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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ce Lee Jan 26. 2021

대한민국의 봄날을 기다리며

「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김누리」

오늘은 공부를 더 하고 싶었던 스물네 살의 내가 자꾸 떠오른다. 아마도 「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라는 책을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교 졸업반, 나는 취업보다 대학원에 진학하여 연구를 하고 싶었고, 어쩌면 이미 그때 나는 공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 같다. 하지만 부모님의 은근한 반대, 나 혼자 학비를 감당하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일단은 취직을 선택했다. 잠깐 들어갔다가 돌아 나오려 했던 그 길로 벌써 십 년이라는 세월을 걸어왔다. 분명 이 숲 안으로 들어선 어느 날인가에는 가슴이 아리고 저릿했을 텐데, 한참을 걷다 보니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았다. 잊고 싶었는지 애써 잊으려 한 건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저자가 말하는 독일의 무상교육 ‘바퓍’을 읽는 부분에서 나는 나의 절망이 떠올랐고, 위로를 얻었고, 치유받았다. 한없이 가슴이 아릿아릿했다. 스스로 등록금을 마련하며 학교를 다니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꿈에 대한 내 열정이 그만큼 부족했던 것이고 내가 나약했기 때문이라는 자책감을 내심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만약 우리나라도 대학 학비가 무상이었다면 어땠을까? 혹은 금액이 지금의 절반 가량만 되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부담 없이 하고 싶은 공부를 더 이어 나갔을 테고, 꿈을 돈과 맞바꾸면서 포기를 애써 정당화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오늘도 누군가는 현실을 위해 더 공부하는 일을 포기할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이것을 ‘어른스러운’ 혹은 ‘현실적이다’ 라거나 ‘지혜롭다’라고까지 한다. 교육에 이렇게 큰돈이 드니,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대학원 같은 것은 포기하는 것이 더 책임감 있는 선택이고 돈 버는 일이 더 가치 있는 일인 것이다.


나는 이제 조금 빠듯하게 지내면 대학원에 갈 수 있는 정도의 여유는 생겼지만, 여전히 또 다른 장벽이 존재한다. 한국에서는 서른 중반이 넘어 일반대학원에 가는 일도, 학부를 다른 학교에서 지내고 가는 일에도 차별 아닌 차별과 기회의 박탈이 존재한다. 때문에 대학원 진학을 하겠다고 하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말린다. 공부를 하고 싶다면 늦게라도 다시 언제든 시작할 수 있는 분위기라면 얼마나 좋을까. 늦은 나이여도 동등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공부를 하다가 스스로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는 것과, 돈 때문에 시작도 못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돈이 생겼을 땐 시간이 늦어 할 수 없는 것도 참 슬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못다 이룬 꿈을 내 서재 안에서 이루려 꾸준히 읽고, 공부하고, 또 쓴다. ‘바퓍’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마다 내 가슴이 아릿한 것은 아마도 이렇게 꽁꽁 숨겨둔 나의 좌절의 한 조각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그리고 그 절망의 이유를 내 안에서 찾았던 지난날을 이 책을 읽고 이제서야 덤덤하게 밖으로 꺼내어본다. 삼십 년 뒤쯤 나의 손녀는 다른 시대에서 살기를 바라면서.


나는 내게 가장 와 닿는 ‘교육’ 이야기를 먼저 꺼냈지만, 이 책은 교육 말고도 각 영역에서 대한민국의 현재를 속속들이 비추어낸다. 왜 우리가 ‘헬조선’이라고 부를 만큼 좌절과 분노가 가득한 사회가 된 것인지 지난 역사의 발자취를 하나씩 돌아보고, 독일의 체제를 함께 소개하면서 우리의 것과 비교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크게는 <야수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 <정치 민주화는 성공했지만 경제 문화 사회적 민주화는 실패한 사회>, <보수와 수구만 존재하는 정치> 이렇게 세 가지가 가장 의미 있는 주제라고 생각된다.


먼저, 자본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고등학교 정치경제 시간에 배운 자본주의에 대한 개념이 먼저 떠오른다. 수업 말미에 선생님이 덧붙였던 “자본주의는 많은 장점을 가진 효율적인 체제이지만, 그 자체로는 결코 완벽할 수 없고 많은 부작용이 있다. 그래서 일정 부분은 나라가 개입하여 조정할 필요가 있다.”라는 문장이 나의 뇌리에 깊게 박혔다. 어린 나이에도 그것이 맞다고 생각했고, 그 개념을 잊지 않고 지내왔기에 늘 내 가슴속 한 켠엔 왠지 모를 불편함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우리나라는 극단적 자본주의의 모습을 갖게 되었고, 이미 돈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세상이 되었다. 실업, 경제적 양극화, 고용 불안에 좌절하면서도 통제의 필요성은 외면하고 그저 방치하고 있다. 자유시장경제를 통해 사회주의의 단점을 보완하고 더 나은 이상을 위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장 자본주의다운 자본주의, 돈과 소비의 논리가 사람을 지배하고 먹어 삼키는 자본 독재 시대를 우리는 이미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몇 년 전부터 계속 내놓고 있는 정부의 부동산 대책만 해도 그렇다. 비록 결과적으론 줄줄이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나는 시도 자체는 의미 있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특히 작년, 집이 몇 채씩 있는 사람에게 많은 세금을 부과하고 전세금을 일정 금액 이상 올리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하는 대책 자체만을 놓고, 우리나라를 공산주의로 만들어간다느니 어떻게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런 통제와 강압적인 정책을 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치를 떠는 사람들이 많았다. 복지국가 자본주의를 갖고 있는 북유럽을 비롯하여 자본주의에도 다양한 형태가 존재하는데, 우리는 이미 극단적인 자본주의만 지극히 옳다고 믿고 있기에 오히려 정부의 개입을 심각한 위기의 상태로 느끼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나라를 작은 미국이라고 말한다. 어느 학자는 우리를 미국보다 더 미국 같은 나라가 되었다고 말한다. 나는 그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미국과 많은 것이 닮아가고 있다.


두 번째는 정치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여당을 지지하든 야당을 지지하든 자신이 지지하는 당이 잘못을 할 땐 기꺼이 비판도 할 수 있는 국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나라는 너는 빨간색이냐 파란색이냐의 편 가르기와 흑백논리로만 정치를 이야기한다. 둘 중 한쪽에 속하면 그 집단이 무엇을 하든 찬사만을, 상대에게는 비난만을 하는 것이 하나의 표준이 된 분위기다.


나는 문 대통령을 좋아하고 존경하며 파란색을 지지하긴 하지만, 사실 파란색이 100퍼센트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많다. 그런데 오늘날 문 대통령을 강력히 지지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표방한다고 하면서도 누군가 조금만 의문점이나 비판적인 이야기를 건네면 매우 공격적이고 방어적인 것을 보게 된다. 특정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문 대통령을 지지하면 무조건 문대통령과 민주당의 행보를 칭찬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반대편이라거나 정치에 무지한 한심한 사람으로 몰아가곤 한다.


나는 그렇게 파란색이 껴 주지 않는 어떤 이름 모를 색이 되어, 그러나 파란색의 옆 어딘가에 서서 조용히 머물렀다. 그렇게 서 있다가 어느 순간 점점 정치에 대해 무지하고 무심해졌는지도 모른다. 무조건적인 지지와 수용을 할 만큼 광팬이 되지도 못했고, 어느 것이 진실인지도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흑과 백 중 하나의 확실한 진리만을 붙잡는다는 건 내게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분명 나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가슴이 답답한 젊은이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점점 나라가 하는 모든 것에 회의적이 되고, 결국 정치에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코스를 밟게 되는 것이다.


오래전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이룩해낸 이들에게는 도전과 비판을 기꺼이 수용하는 정신과, 적어도 깨어서 소통하는 어떤 ‘활력’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진보’라고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고립되고, 멈추고, 방어적인 모습만 남아있는 것 같다. 상대방에 대한 대립과 비난만 가득한 정치인들의 모습을, 그들을 지지하는 국민들도 그대로 닮아가고 있다. 저자는 우리의 정치를 보수와 진보가 아닌 ‘수구’와 ‘보수’라고 말한다. 그리고 ‘진보’라는 탈을 쓴 ‘보수’ 세력은, 수구보다는 낫다는 ‘도덕적 우월감’에 젖어 반성과 성찰을 전혀 하고 있지 않기에, 정권이 바뀌어도 달라지는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을 꼬집는다. 게다가 정치 민주화를 이루어 전 세계적으로 칭송받는 나라임에도, 아직까지 사회 민주화, 경제 민주화, 문화 민주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슬픈 현실도 덧붙인다.


이 책은 참 다행스럽게도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는다. 그저 우리 정치의 현주소를 거울로 투명하게 비춰줄 뿐이다. 수구와 보수만 존재하고 사회, 문화, 경제의 민주화는 여전히 이루지 못한 지금의 정치 현실 만큼은 빨간쪽도 파란쪽도 결코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에 쓰인 내용은 어쩌면 우리 개개인이 마음속에만 품고 감히 밖으로 내지 못했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특히 제3장의 <수구-보수지배>를 다루고 있는 챕터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큰 위로이자 희망이고, 하나의 나침반이 되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대해 한 가지를 확실히 해 두자면, 읽는 내내 조금은 불편할 수 있다. 특히 초반부에서는 마치 독일은 다 멋지고 괜찮고, 우리나라는 다 열악하고 초라한 것처럼 묘사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독일의 교육, 정치 시스템, 경제 정책 등과의 비교를 통해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취지이나, 약간의 톤 조절이 필요할 것 같다. 물론 책을 끝까지 읽고 나면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게 되어 그런 오해는 사라지고, 오히려 그가 대한민국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끼게 된다. 그러니 마음이 편치 않더라도 부디 마지막 장까지 책장을 넘기는 것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약간의 불편한 부분이 있더라도 이 책의 진정한 의미를 읽어내야 할 것이다. 다른 나라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은 기꺼이 타산지석으로 삼아 이상을 세우고, 적용하고, 변화를 꿈꾸는 일을 해내는 것, 아니 해내지 못하더라도 그러고 싶다는 열망을 온 국민들이 가슴에 품게 되는 것이 이 책이 쓰여진 목적이자 소명일 것이다. 아마도 대한민국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크기에 그만큼 쓴소리가 많이 담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우리가 함께 걸어온 시간 속에 역사가 남긴 것들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건강한 사회의 기준은 무엇인가도 함께 생각해본다. 이 책의 제목처럼 우리의 ‘불행’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 내가 느낀 당연한 좌절과, 당신이 느낀 당연한 좌절은 분명 다를 것이다. 혹 누군가는 기득권의 자녀로 자라 전혀 실감이 나지 않을 수도 있을 테지만, 같은 시절 속을 지나온 우리는 분명 대부분 이 유례없는 사회가 남긴 한두 가지의 상처와 절망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당연하게 지내왔던 모든 것들을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걸 깨닫는 의미 있는 순간이 모두에게 찾아오기를 바란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부르는 이 ‘헬조선’이라는 슬픈 별명은 결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살기 좋은 나라,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행복한 나라가 되는 어느 봄날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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