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종이를 한 장만 주는 이유
블로그 이웃 중 한 분이 미술 선생님인데 아이들에게 종이를 무한정 제공하지 않는다고 했다. 종이 한 장, 앞면과 뒷면, 두 번의 기회가 아이들에게 주어진다. 기회가 많아진다고 그림을 더 잘 그리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한정된 기회 덕분에 더 신중하게 잘 그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인생 역시 그렇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 역시 공감이 되었다.
오래전 어느 책에서 비슷한 미술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아이들에게 지우개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기의 의도에서 조금 벗어났다고 자꾸만 지우기보다는 그것을 잘 살려서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 것을 바란다고 했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은 이쪽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주어진 기회는 오로지 한 번뿐이고 지나온 시간을 지우거나 새롭게 그릴 수 없다.
아이들의 답답한 마음도 충분히 이해한다. 어린 시절 나에게 스케치북 한 장의 귀함을 알려준 것은 현명한 미술 선생님이 아니라 가난이었다. 미술 수업이 있는 날이면 떨리는 마음으로 스케치북이 몇 장이나 남아있는지 미리 확인하곤 했다. 스케치북을 마음껏 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에 조금 틀리면 지우개로 조심해서 지우고 물감을 잘못 칠하면 어떻게든 창의력을 발휘해 수정해야만 했다. 지금에서야 그것도 나름 좋은 점이 있었을 것이라 자기 위안을 하지만 그때는 아쉽기만 했다. 조금 그리다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욱 찢어버리고 양손으로 꾹꾹 눌러 구겨버리는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나도 그렇게 새하얀 종이에 처음부터 다시 그리고 싶었다.
잠자리가 그려진 톰보우 지우개를 쓰는 친구들도 부러웠다. 유난히 말랑말랑한 그 지우개는 연필의 흔적을 깨끗이 지워줄 뿐 아니라 스케치북에도 상처를 거의 내지 않았다. 다만 너무 부드러웠던 탓인지 지우개 똥을 잔뜩 만들어냈고 몇 번 지우다 보면 눈에 띄게 크기가 줄어들곤 했다. 지우개로서는 더없이 훌륭하지만 사람이라 생각하면 영 별로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살피느라 자신을 상처투성이로 만들고 점점 더 작아지게 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언젠가 지우개 똥을 뭉쳐 무언가를 만드는 놀이가 유행한 적이 있었는데 몇몇 친구들은 오로지 그 놀이만을 위해 아무것도 지우지 않은 지우개 똥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전혀 지우개 똥답지 않은 새하얀 그 모습을 보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어린 시절의 가난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든 새하얀 종이에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면, 결국 스케치북을 찢어버리고 마는 딱딱한 싸구려 지우개가 아니었다면, 나는 몇 번이고 잘못 그려진 인생을 구겨서 던져버리고 싶었던 충동을 이기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느 날 조물주가 나타나 지우개나 새로운 종이 한 장을 건넸다고 생각해 보자. 지나온 인생을 원하는 대로 지우고 새로 그리면 과연 지금보다 더 나아질까. 일단 나는 자신이 없다. 영화 '어바웃 타임', '시간을 달리는 소녀'나 드라마 '눈이 부시게'만 봐도 그렇다. 마음에 들지 않는 무언가를 되돌리기 위해 시간 여행을 하지만 꼭 생각하지 못한 다른 어려움이 나타난다. 별것 아닌 잘못을 바로잡으려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기도 하고 애초부터 없던 것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새로운 종이나 지우개가 주어지지 않는 것에 불평할 것이 아니라 남은 여백을 어떻게 채워나갈지, 삐져 나간 선을 어떻게 잘 마무리할지 고민하며 주어진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내는 것이다. 경험을 바꿀 수 없을 때 비로소 관점이 바뀐다. 단 한 번뿐인 인생이기에, 오히려 우리는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