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만도 못한 어른
"너는 어쩜 애만도 못하니?"
흔히 철없는 어른을 비난할 때 이렇게 말하곤 한다. 그런데 살면 살수록 의문이 든다. 어른이란 존재가 과연 어린아이들보다 나은 것인가 하는. 오히려 아이가 어른보다 훨씬 더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들 정도이다.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어른과 아이는 낫고 못함을 따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아이도 결국은 어른이 되고 어른 역시 아이였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피터팬처럼 영원히 자라지 않을 수 있다면 지체 없이 아이의 삶이 더 낫다고 손을 들어주겠지만.
물의 정원, 아니 아마도 마음 정원이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글귀를 만났다.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파블로 네루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면서 스치듯이 본 것이라 첫 문장인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만 읽을 수 있었다. 다음 문장이 궁금해서 자전거를 돌려 되돌아가려다 그만두었다. 그 한 문장만으로도 마음속이 가득 찼기 때문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불러보았다. '잘 있니?' 얼마 지나지 않아 대답이 들려왔다. '잘 있어요.'
참 다행이었다. 불러도 대답이 없고 생사 여부조차 알 수 없었던 파블로 네루다의 동심과는 달리 내 안의 동심은 여태 살아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어린 시절의 동심처럼 활기차고, 반짝반짝 빛이 나는 느낌은 아니었다. 횟집 수족관의 물고기들 마냥, 살아있으나 정말로 살아있다고 말하기는 힘든 상태였다. 오히려 죽어가고 있다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로.
수족관 속 물고기는 어떤 생각을 할까. 헤엄도 제대로 치지 못하는 좁은 공간 속에서 점점 죽어가는 자신을 활어(活魚)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좋아하는 인간들이 우습지 않을까. 당신은 어떠한가. 아직은 활인(活人)이지만 사실은 죽어가고 있는, 어쩌면 이미 반쯤 죽은 상태는 아닌가?
살아있는 것과 죽어가는 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냐고? 아주 간단하다.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자신과 얼마나 동떨어져있는지 비교해 보면 된다.
몇 달 전 SRT 열차를 예매했는데 아무런 사전 안내 없이 KTX 열차로 변경되었다. 좌석 간격은 더 좁고 와이파이, 충전 콘센트도 없었다. 심지어 가운데 네 명이 함께 앉는 패밀리 좌석으로 배정되었다. 어쩌면 낯선 이와 무릎을 부딪히며 부산에서 서울까지 가야 했다.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불쾌하던지.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역방향 좌석이 아니었다는 정도였다. 바로 옆 패밀리 좌석에 앉은 이들은 역방향이었고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맞은편에 사람이 탔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자리를 버리고 빈자리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메뚜기처럼 옮겨 다니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다행히 우리 자리에는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앉지 않았다. 참 편하고 좋았겠다고?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열차가 역에 정차할 때마다 이번에는 우리 자리에 사람이 타려나 생각하며 불안해했다. 원래였으면 푹 자면서 올라왔을 텐데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렇게 겨우 서울에 도착했을 때 아이가 말을 했다.
"아~ 편하게 잘 왔다."
"응? 편했다고?"
"응, 다리도 쭉 뻗을 수 있어서 좋았어."
그 말을 듣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이는 맞은편에 누가 앉을까를 걱정하며 현재를 낭비하는 일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편하고 좋은 지금에 집중하며 누렸을 뿐.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걱정하며 불안해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인간이 아니라 어른만의 특징인지도 모르겠다.
결혼도 잘 하지 않고 아이도 잘 낳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아이가 없는 삶이 더 편하고 좋은 면도 분명히 있지만 아이가 있는 삶도 한 번쯤은 누려보면 좋을 것 같다. 경제적인 이유만으로 출산을 꺼려 하는 이들은 더욱 그렇다. 절대적인 빈곤 상태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밝고 에너지가 넘치고 세상 긍정적인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팍팍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른다. 살아야 할 이유를 깨닫지 못한 채 점점 죽어가고 있는, 아직은 활인(活人)인 상태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다들 힘들어서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이토록 힘든 세상이기에 아이라는 선물이 더 빛을 발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왠지 파블로 네루다에게는 아이가 없었을 것 같다. 검색을 해봐도 아내의 이야기만 나올 뿐 아이에 관한 것은 없다. 나 역시 아이를 낳고 기르며 곁에서 지켜보지 않았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사라진 동심을 그리워하며 시를 썼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