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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기 Jul 26. 2023

이북 할머니

특정 자극을 통해 깊이 잠들어 있던 기억이 깨어나는 것을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바로 프루스트 효과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홍차에 적신 마들렌의 냄새를 맡고 어린 시절을 떠올린 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소설을 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나도 그렇게 떠오른 기억이 하나 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세 들어 사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오락실 주인의 아들이었고 또 한 사람은 이북 할머니였다. 그런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북 할머니의 존재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 북한에서 피난을 왔다는 것을 제외하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교류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사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80년대 중후반만 하더라도 북한에 대한 인식이 지금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대놓고 포스터를 그리거나 북한군을 늑대로 상상하던 시절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니 북한에 대한 감정이 어떻게 좋을 수가 있겠는가. 그런 분위기 탓이었을까. 나는 북한에서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북 할머니가 무섭고 꺼려졌다. 


그 시절에 두 사람이나 세 들어 살았을 정도면 집이 꽤 살았던 것 아니냐고? 슬프게도 전혀 그렇지 않았다. 화장실은 재래식이었고 대문도 없었다. 이북 할머니가 세 들어 살던 별채는 연탄을 때야 할 정도로 열악했고. 게다가 물을 쓰려면 우물에서 펌프로 끌어올려야 했는데 겨울에는 얼어붙는 날이 많았다. 이것만 이야기해도 충분하지 않은가. 절대로 남에게 세를 받고 내줄 만한 집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그런 집에 세 들어 살 정도였으니 그들의 형편이 오죽했겠는가. 


한국 전쟁이 1950년에 일어났으니 이북 할머니가 우리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던 것은 이미 그로부터 30년 이상이 지난 뒤였다. 그 긴긴 세월을 할머니는 어떻게 견디셨을까. 얼마나 혹독한 시간이었으면 집 같지도 않은 이런 곳에 홀로 세 들어 살게 되었을까. 어린 시절의 나도 가엽지만 이북 할머니는 더욱 가엽다는 생각이 든다. 


프루스트가 어린 시절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 마들렌의 냄새 덕분이라면 이북 할머니를 떠올리게 한 것은 무엇이냐고? 얼마 전 20대 청년이 떠난 방을 청소하는 내용의 글을 보았기 때문이다. 번개탄을 피워 스스로 생을 마감한 청년의 방에는 불닭볶음면 봉지, 배달음식 용기, 소주 등이 있었다. 그리고 특별히 내 눈에 띄는 것들이 있었다. 게임할 때 쓰는 조이스틱, 레이싱 핸들, 닌텐도 스위치 동물의 숲 에디션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나처럼 게임을 좋아했던 모양이다. 다정한 동물 주민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따스해지는 동물의 숲도 좋아했던 것 같고. 한참 동안 품절이라 구하기 어려웠던 동물의 숲 에디션 스위치를 사고 그는 얼마나 기뻐했을까. 그것을 남기고 떠나는 그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이제 곧 젤다 야생의 숨결 차기작이 나오는데 그거라도 위안 삼아 버티면 좋지 않았을까. 뭐 이런 생각들을 했다. 그가 나의 지인이었다면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었을까. 그저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것 말고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으리라. 


분명 이런 주제를 놓고 여러 번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은 또다시 새하얀 백지장이 되고 말았다. 생명이 주어진 이상 그냥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자꾸만 묻게 된다. 인간이 사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정녕 현실에 절망한 뒤 떠나려는 이들을 붙잡을 방법은 없는 것일까. 내가 만약 그 상황이 된다면.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그 상황이 된다면 어찌하면 좋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이 답답하던 그 순간 불현듯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 사람이 바로 이북 할머니이다. 타임머신이 생긴다면 나는 꼭 과거로 돌아가서 이북 할머니에게 묻고 싶다. 우선은 어쩌다 마주치면 쭈뼛대다가 도망부터 갔던 것을 사과해야 할 것이다.


할머니를 만나는 상상만 해도 눈물부터 난다. 한참을 울고 난 뒤 할머니의 두 손을 꼭 붙들고 묻고 싶다. 할머니 도대체 어떻게 사셨어요? 가족도,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낯선 이곳에서 그 모진 세월을 어떻게 견디셨어요? 상상 속의 할머니는 그저 인자한 미소만 띠고 계실 뿐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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