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가 지나면 모기 입이 삐뚤어진다는 말이 있다. 요즘 실정에는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처서는 양력 8월 23일 무렵을 가리키는데 모기의 입이 삐뚤어지기는 커녕 왕성하게 잘만 활동하고 있으니. 24절기로 따진다면 아무리 못해도 입동(양력 11월 7일 또는 8일)은 되어야 모기가 제대로 활동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왜 옛날에는 처서가 되면 모기 입이 삐뚤어진다고 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단열과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는 환경 탓이었으리라. 아직은 여름인 8월이지만 저녁과 밤에는 꽤나 쌀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름밤의 추위 때문에 난방을 때는 것은 지극한 사치로 여겨지는 시절이었다. 인간들은 인간 나름대로 여름날의 추위를 견디고 모기 역시 밤새 덜덜 떨다가 입이 삐뚤어지고 만 것이다.
11월에 들어서고 모기들이 싸그리 자취를 감췄다. 그래서 숙면을 취하고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그런데 며칠 전 참으로 오랜만에 방 안에서 모기 한 마리를 발견했다. 한 눈에 봐도 기운이 없어 비실대고 있는 상태였다. 우리네 선조들은 이런 모기의 상태를 보고 입이 삐뚤어졌니 어쩌니 했던 것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기의 살아가는 의미는 다른 생물의 피를 빨고 얻은 힘으로 알을 낳아 종족을 보존 시키는 것 아니었던가. 피를 빨 의지는 여전하지만 그 능력을 잃은 모기는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일까. 비실대는 모기들의 존재 의의는 무엇일까. 어쩌면 모기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실존이 본질보다 앞선다라고 한 철학자 사르트르의 말처럼.
생각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나의 수면을 방해하던 모기에 대한 미움은 사라지고 측은한 마음만이 남았다. 그렇다고 해서 비실대던 그놈을 살려보내준 것은 아니다. 추운 바깥 세상에서 얼마간 연명하는 것보다는 고통없이 한 방에 생을 마감하는 것이 그놈에게도 좋지 않을까, 하고 지극히 인간중심적으로,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다.
모기에 시달린 다음날 아침, 피를 잔뜩 빨아들여 통통해진 모기를 한 방에 탁하고 터뜨려 잡을 때는 쾌감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배를 곯을대로 곯아 비쩍 마른 모기를 때려잡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분명 그렇게나 나를 괴롭히던 모기와 같은 족속인데 왜 이리 다른 감정이 느껴지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의 DNA 속에 깊이 새겨진 약함에 대한 동정 때문이다. 물론 인간은 모순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약함을 항상 동정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경멸하거나 무시하기도 한다. 철저히 짓밟기도 하고. 강함을 대하는 태도 역시 다르지 않다. 경외하고 따르기도 하지만 속으로는 질투하고 미워하기도 한다. 혁명을 통해 다 뒤집어지기를 바라기도 하고.
인간은 왜 약한 것을 동정하게 만들어졌을까. 왜긴 왜겠는가.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개인 뿐 아니라 종족을 놓고 봤을 때도 마찬가지이고. 인간은 유독 약하게 태어나는 동물이다. 부모의 도움을 가장 오래도록 필요로 하는 동물이기도 하고.
게다가 늙으면 늙을수록 나약해지는 동물이다. 할 수 있는 것들이 하나 둘 줄어가고 결국은 다른 이의 도움 없이는 생존을 유지하기 힘든 지경에까지 이른다. 만약 인간에게 약함에 대한 동정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젊고 건강한 개체들은 연약한 개체들을 쓸모없는 존재라 여겨 다 내쫓아버리지 않았을까. 어쩌면 드물게 그런 어리석은 종족이 과거에 실제로 존재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기와 노인을 쓸모없다 여긴 그들은 이내 사라지고 말았겠지만.
비실대는 모기를 보며 점점 나이들어가는 부모님이 떠올랐다. 예전의 건장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약해져 가는 부모님을 떠올리면 가슴 한 구석이 아려온다. 하지만 나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부모님의 작아진 등, 약함 덕분에 오래도록 품고 있던 부모님에 대한 서운함 같은 것들도 옅어졌기 때문이다. 비실대는 모기를 보며 지난 날의 미움이 다 사라졌듯이.
결국 인간이 약하게 태어나 약하게 죽는 것은 사랑을 위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사랑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사랑받기 위함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