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훈은 안 감독을 찾아가
“나 같은 놈이 또 있는 줄 몰랐다. 너 왜 그런지 알아. 너하고 나만 알아. 연기시켜보니까 알겠지? 네 시나리오 완전 별로인 거.”
라고 하며 안 감독의 치부를 찌른다.
이후 기훈은 유라를 찾아가 독백처럼 말한다.
“영화 찍으면서 알았어. 망했다. 큰일 났다.”
그리곤 말을 잇는다.
“구박하면 할수록 벌벌 떨며 엉망으로 연기하는 너(유라)를 보며 더 망가져라. 더 망가져라. ‘내가 무능해서가 아니라 쟤가 무능한 거다’라고 마음으로 속삭이다가 반쯤 찍은 영화를 보고 제작사가 엎자고 했을 때 안심했었다.”라고 고백한다.
- 드라마 나의 아저씨.
영화감독이었던 기훈의 메타인지인 셈인가.
‘내 시나리오가 별로인 것을 나는 안다.’
하지만 그것을 감독 스스로 가볍게 인정하고 만천하에 드러낼 수는 없을 것이다.
“여러분, 영화를 찍어보니 제 시나리오가 너무 별로네요. 인정.”
이라며 쿨내를 드러내는 순간, 투자자들에게 몰매 맞겠지. 제작팀이며 지금까지 들여온 노력이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들인 그 수고를 다 어쩔 것인가. 이럴 땐 책임전가. 남 탓이라도 해 둬야지 작게나마 숨 쉴 구멍 하나라도 마련되는 게 아닐까. 나만 아는 나의 나쁜 짓은 비밀로 붙인다. 비루하지만 괜찮다. 세상에 단 한 사람, 나만 아니까 솔직히 좀 다행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 사람의 하루하루는 언제라도 절대 혼자인 시간을 마주치며 살게 되어 있다. 버스 타고 이동하는 시간, 샤워하는 시간, 잠들기 전 등등. 이런 절대 고독의 시간마다 이 사건은 상기될 것이다. 괴롭겠지. 이 또한 어쩔 수 없다.
누구에게나 이런 순간이 있지 않을까. 내가 아주 잘한다고 믿었던 한 분야에서 탁 하고 꺾이는 순간. 나는 알아챘는데, 남들은 절대 못 알아채게 만들어야만 하는 그런 사건들.
작가, 그러니까 글을 쓴다는 사람들은 이런 글을 어떻게 알아챌까. 사실, 알아채는 건 어쩌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내가 쓴 글을 읽다 보면 스멀스멀 어둠의 기운이 다가온다. 자주 그렇다.
‘산으로 가고 있... 아니. 이미 갔네 갔어.’
그럼, 이미 이렇게 쓴 글을 이후에 어떻게 잘 정리해야 하느냐가 짝꿍처럼 따라붙는다.
- 이야기 흐름이 처음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을 때
- 이야기를 쓰다 보니, ‘어 이게 아닌데’를 알았지만 끝까지 처음 생각으로 써야만 할 때
- 이미 너무 많이 써서, 고쳐서 다시 쓰기엔 마감이 임박했을 때
- 스스로 너무 힘들어서, 이제 대충 마무리하고 싶을 때.
대부분의 글이 이렇게 풀리면 작가들은 아마도 ‘안’ 쓸 것이다. 그럼에도 써내야 하는 상황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경우, 글이 덕지덕지가 되는 경우가 많다.
독자에게 내 이야기가 잘 전달이 안 될 것이라는 것을, 작가 스스로는 이미 알아챘지만 ‘모르는 척’하고 싶다. 내용물은 별로인데 명품 포장지로 포장해두면 뭔가 좀 괜찮아질 거 같다고 스스로를 속인다.
이런 경우는 문단을 통째로 드러내거나 문장을 깔끔하게 다듬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수준이 아닌 경우가 잦다. 흐름 자체가 이미 틀어진 것이다. 이제 쓰는 작가도 불안해진다. 독자가 내 생각을 잘 알아먹을까.
작가는 독자 한 명 한 명을 붙잡고
“아, 그렇게 이해하셨어요? 저는요... 그렇게 쓰려고 한 것이 아니구요. 사실은 말이죠. 제 말 한 번 잘 들어보시겠어요? 원래는 이런 이야기였거든요.”
라고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작가들이 제일 잘하는 포장 방법은, 결론에 지금까지의 글을 정리하여 설명조로 덧붙이는 것이다.
이제부터 작가는 일타강사로 빙의된다. 지금까지 수업 70분 들은 것을 수업 5분 전에 짜르르하게 정리해주는 선생님이 되어, 정리 모드에 들어간다.
‘이건 이런 뜻이고 저건 저론 뜻이죠~ 자 그러니까 이게 결론입니다. 이해되셨죠~’
이제부터 글 마지막에 친절한 정리가 들어간 글을 보면, ‘아, 작가님 많이 불안하셨어요? 그랬구나. 그랬구나.’라고 좀 따뜻하게 이해해 주는 것도 초보 작가를 다독여 주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이렇게 마지막 5줄 정리를 해 주었는데도 왠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 작가는, 이제 글을 총체적으로 다듬기 시작한다. 지금부터 필요한 건 뭐? 미사여구. 형용사. 부사. 어휘력.
- 미자는 밥을 먹었다.
아니지. 이거 아니고
- 미자는 밥을 미어지게 먹었다.
아, 이것도 아닌데.
- 미자는 밥을 입이 미어지게 그리하여 입 가장자리가 살짝 찢어질 정도로 크게 벌려서 먹었다.
아이. 진짜. 이건 문장이 너무 길어.
이런 식의 형용사와 부사와 상황설명이 덧붙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독자도 지친다. 그래서 작가님, 쓰고 싶었던 게 뭔가요. 작가도 헷갈린다. 일단 접고 한 숨 자자. 내일 쓰면 더 잘 써질 것이다.
나는 내 글이 너무 갔다는 것을 두 가지로 판단한다. 일타 강사 빙의 마지막 문단 결론 정리와 남발된 미사여구. 이렇게 쓰여진 글은 서랍 속에 고이고이 접어두는 게 맞다.
그래서, 이게 김훈 작가와 무슨 상관일까요?
사실, 글을 쓰기 전에는 몰랐다. 김훈의 글을 읽으려고 한 적도 없었다. ‘칼의 노래’라는 100쇄를 찍었다는 그 명전을 나는 그저, 이순신? 전쟁? 좀 식상하면서도 무섭다며 읽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연히 읽게 된 저 소설은, 그냥 소설이 아니었다. 지금 읽고 있는 '저만치 혼자서'에 실린 단편들도 그렇다.
김훈의 문장은 단순하다. 그래서 쉽게 읽힌다. 쉽게 읽히지만 자주 멈칫, 내가 글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하게 해 준다.
김훈은 “나는 감정을 글에 개입시키지 않으려고 애썼다,”(저만치 혼자서. p.253)고 썼다. 김훈 작가는 작가 된 자의 설명조로 먼저 울거나 먼저 웃지 않는다. 작가의 호들갑이란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이 감정을 느끼고 해석하는 것은 개별 독자의 몫이 된다.
이야기 속 주인공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이제부터 상상은 나의 몫이다. 김훈의 글에는 공간이 띄엄띄엄 띄어져 있다. 독자인 내가 슬플 공간, 아플 공간, 마음이 저며지는 공간, 피식하고 웃을 공간, 울 공간, 멍할 공간. 작가가 화자의 마음을 단순하게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독자인 내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만 소설이 진행된다. 여지없이 쓴 김훈의 글에, 내가 나만의 여지를 끼워 맞춘다.
그래서 김훈의 소설을 읽으며 나는 작가와 내가 함께 글을 ‘만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글을 대할 땐, 이 여지없음이 조금은 아쉬웠다. 작가님 좀 친절하게 설명 좀 해 주시지요. 내가 느끼고 파악한 것이 작가의 의도를 잘 해석한 게 맞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지금 수능 지문을 읽는 것이 아니다. 김훈은 말하겠지. 그건 당신 몫이요.
김훈 작가의 글을 좋아하는 데는, 개별 독자에게 줄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여지없는 글을 쓰는 작가의 분투 또한 상상되기 때문이다. 적확하지 않으면, 공간을 만들 수 없다. 글이 부실공사처럼 스르르 무너질 것이다. 얼핏 설긴 듯하게 쓰기 위해서 작가는 문장을 얼마나 드러냈을까. 이야기는 드러내지 않고 남은 문장의 힘만으로 스스로 간다. 그러기에 남은 문장은 각각 개별 문장으로써의 존재의 이유와 힘이 있어야만 한다. 기실, 너무 피곤한 작업일 것이다. 그 한 문장. 한 문장. 그것들만 남기기 위해서 부실한 것들은 다 삭제한다. 아깝다. 드러내는 그 문장이라고, 작가의 고뇌가 옅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김훈 작가는 아직도 연필로 쓴다고 하니, 애초에 그런 문장을 만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김훈의 글쓰기를 상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렇게 명료하고 여지없는 글을 여러 권 썼다 함은, 작가의 삶 또한 그러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정도만 얕게 가늠할 뿐이다. 나로서는 그렇다. 이런 나는 오늘도 김훈 작가의 문장을 필사해야지 하면서, 예능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