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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소 Jul 26. 2019

엄마손은 맛손

닭볶음탕

내가 주부가 된 지 10년 차가 되었다. 가끔 친정 부모님이 오셔서 내가 직접 밥을 해드리면 이런 멘트를 종종 듣는다.


“이제 진짜 엄마가 다 됐군.”

“네 엄마 딸이 맞네. 손맛이 비슷해.”


아버지로선 최고의 칭찬을 날려 주신 셈이다. 평소 친정엄마의 밥상에 늘 엄지 척을 날리시며 계모임에 다녀오셔도 꼭 따로 밥상을 받으시는 우리 아부지. (사랑합니다.)


된장찌개, 김치찌개는 물론, 요리라고 불릴만한 음식들 (갈비, 전골류, 퓨전음식 등등) 점점 할 줄 아는 음식이 늘어나고 자신감이 생길 때마다 친정부모님께 해드리려고 노력한다. 그렇지만 내가 절대 따라 하지 못할 엄마표 음식이 있다.


내가 엄마의 손맛이 담긴 음식 중에 가장 좋아하는 것은 맛있게 빨간 닭볶음탕이다. 기분 좋은 매콤함이 고스란히 비주얼로도 드러난다. 한 번 끓여낸 뽀얀 닭, 아무것도 아닌 거 같지만 제일 중요한 멸치다시육수, 무심하게 툭툭 자른 큼지막한 감자와 당근까진 내가 어찌어찌 흉내 내 볼 수 있다. 그다음이 문제다. 엄마표 만능 간장(대략 10가지 야채를 간장으로 끓여 만든 엄마만의 간장)과 지인 찬스로 귀하게 모셔온  빛깔 나는 고춧가루로 요리는 시작된다. 쫄깃한 닭고기에 스며든 그 빨간 양념 맛은 감히 내가 흉내 낼 수가 없다.


한 편, 나에게 가장 슬픈 추억의 음식도 닭볶음탕이다. 가장 좋아했기에 가장 슬픈 추억이 스몄다.


내가 고1 때, 엄마가 굉장히 많이 아프셨다. 말기암 4기 진단을 받으셨고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대사를 듣고 말았다. 그때 그 의사분이 잊히질 않는다. 의사 선생님을 탓하면 안 되지만 그 냉정한 말투에 어찌나 상처를 입었는지 의사분의 외모마저 부정적인 느낌으로 남았다. 두꺼운 렌즈의 안경을 끼고 제법 통통한 체구의 전형적인 의사 선생님 배역에 딱인 비주얼이었다.


“길어야 6개월이고..”


그 뒷말은 차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하시리라... 냉정한 시한부 선고였다.

그 당시 나는 17살이라 웬만큼 알 거 다 아는 나이 같았지만 마음속은 7살 철부지였다. 엄마가 아프단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처절하게 무너져 내렸다. 얼마나 트라우마가 강했는지 기절을 두 번이나 했었다. 그런데 그 건 나만의 일이 아니었다. 체구는 작으시지만 언제나 슈퍼 히어로 같던 아버지도 꺼이꺼이 통곡하시며 정신을 못 차리셨다. 당시 중학생이던 동생에겐 차마 엄마의 정확한 병명과 상황을 알릴 수 조차 없었다.

우리 가족은 엄마가 돌아가시더라도 최선을 다 해봐야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서울의 큰 병원으로 명의를 찾아 떠났다. 힘겨운 투병생활의 시작이었다.(이 스토리는 언젠가 한 번 다시 글을 풀어내고 싶다.)


내 인생의 첫 번째 터닝포인트가 온 시점이었다.

모든 것을 엄마가 해주던 마마걸은 동생을 돌보고 집안일을 떠안는 ‘체험 살림의 현장’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시점. 어느 날 계란 프라이를 부치고 있을 때 열린 베란다 창문 틈 사이로 맛있는 냄새가 넘어오고 있었다. 다른 집의 저녁 메뉴가 닭볶음탕이었던 것이다. 좋아하는 음식이라 그런지 대번에 냄새로 알아차렸다. 그런데 그만 난 그 자리에 서서 프라이를 다 태워가며 엉엉 울고 말았다.

도무지 눈물이 멈춰지지 않았다. 동생에게 들킬까 봐 얼른 가스불을 끄고 내 방으로 들어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소리 죽여 울었다. 더 이상 엄마의 닭볶음탕을 먹을 수 없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엄마가 돌아가신다는 상상을 1초라도 했다간 부정을 탈까 봐 엄마의 빈자리에 대해 떠올리지 않고 애써 외면하고 있을 때, 그 냄새! 엄마의 맛손이 빚어내던 냄새가  훅 가슴으로 스민 것이다.

마음이 처참해졌다. 내가 책에서 보았던 글귀들을 실제로 경험한 순간들이었다.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이란 표현이 어떤 것인지 물리적인 느낌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심장이 짓눌리고 잡아 비트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처참하고 고통스러울 때 가슴을 쾅쾅 내리치는 이유를 깨달았다.

나는 살면서 로또가 당첨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행운을 고등학생 때 다 써버린 게 분명하다. 엄마의 암세포는 내 주먹만 한 크기였고 진단 또한 4기임에도 불구하고 전이되지 않았다. 하루하루 피 말리는 항암치료였지만 희망을 놓지 않았고 엄마의 육체는 뼈만 앙상하게 남았지만 정신력은 날이 갈수록 무장되었다. 그렇게 버텨내 온 엄마의 강한 의지로 병마와 싸워 하루하루 이겨냈고,  과학과 이성으로 점철된 의료진도 우리 엄마에게 ‘기적’이란 표현을 자주 썼다. 그렇게 엄마는 2년여의 투병 끝에 다시 삶을 이어가실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10대 후반부가 폭풍같이 지나갔다.


시간이 많이 흘러 어느 날 문득 엄마에게 ‘닭볶음탕’이 먹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맛손 장인 엄마답게 뚝딱뚝딱 요리를 하셨고 아주 맛깔난 닭볶음탕이 식탁에 올려졌다.

얼마나 소중한 닭볶음탕인지 알게 되자, 정말 내 위의 한계를 뛰어넘게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커뮤니티에 올라온 어떤 글을 보았다. 친정엄마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담가주신 김장김치를 몇 년째 버리지 못하고 보관하고 있다고...


그 심정, 백 번 천 번 이해한다. 나 또한 엄마 하면 엄마의 음식들부터 떠오른다.

우리 엄마 손은 약손이자, 맛손이다. 아직 현재 진행형으로 쓸 수 있음에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환갑이 훌쩍 넘으시고 칠순을 바라보고 계시지만 아직도 일손을 놓지 않고 고생하시는 모습에 너무 죄스럽다. 내가 좀 더 능력 있는 자식이었다면... 엄마 아부지 두 분 다 좀 편하셨을 텐데....


부모님과의 시간이 과거형이 될까 봐 요즘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자꾸 아프실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나는 한 아이의 부모가 되었지만 여전히 자식이고 싶다.

오래도록 엄마에게 맛있는 닭볶음탕을 해달라고 조르는 철없는 자식이고 싶다.


(건강하세요. 엄마 아빠! 제가 앞으로도 맛있는 음식 배울 때마다 꼭 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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