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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치한 Sep 04. 2023

서른넷의 바흐.

   



    여섯 살 무렵 피아노 학원에 처음 발을 들였다. 당시에 나는 지나친 감수성을 가진 예민한 어린이였다. 엄마는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마음껏 예술혼을 불태우라며 미술학원에 보냈던 터였다. 그림을 그리다가 엄마에게 피아노도 배우겠다고 선언했다. 화가가 된다던 어린이는 돌연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며 눈을 부릅떴다. 꽤나 유복한 집에서 컸던 터라- 하고 싶은 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피아노를 배우게 되었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원장 선생님은 나를 편애했다. 동그라미를 절대 거짓으로 채우지 않았다. 배우는 속도도 여느 또래보다 빨랐다. 원장은 내가 꽤나 대단한 영재라며 엄마에게 칭찬했다. 엄마도 나를 피아노학원에 보내길 잘한 것 같다며 내심 기뻐하다, 그 해 어린이날 선물로 집에 피아노를 들였다.


    피아노가 집에 생긴 후로 나는 집밖으로 나서질 않았다. 놀이터에서 또래 친구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들려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좋아하는 건 모두 집안에 있었다. 슈퍼패미콤으로 게임을 하거나, 방 안에 혼자 엎드려 그림을 그리거나 하며 하루를 보냈다. 모로 누워 거실을 쳐다보다 피아노와 눈이 마주치면 뽈뽈거리며 피아노 앞에 앉았다. 뚱땅거리며 건반을 누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원장선생님이 다음 달엔 바흐를 친다고 했지? 잘해야 돼.’라고.


    그때부터였을까? 집안에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피아노를 치는 내 모습을 지켜보는 아빠의 눈빛에 서늘함이 깃들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눈치 빠른 나는 위기감을 느꼈다. 부러 엄마에게 애교를 부린다거나, 퇴근한 아빠에게 쪼르르 달려가 안아주거나 하는 영악한 행동을 했다. 그마저도 불안해 완벽한 구원투수를 찾았다.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었다. ‘할아버지 나 엄청 잘하지?’ 하고 자랑했다. 무언가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느낌에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공격이자 방어였다. 


    그러다 결국 때가 왔다. ‘남자’라는 단어에 빠져있던 아빠는 ‘계집애’ 같은 고상한 취향을 가진 내가 싫다며 피아노학원을 못 다니게 했다. 지금에야 그게 무슨 소리냐, 시대역행하는 소리라며 따져 묻는 세상이지만, 90년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 동네 남자애들은 모두 태권도를 배우고 축구를 했다. 나만 빼고.


    집안에도 은근한 권위와 힘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건 오롯이 아빠에게서만 나온다. 나는 그 힘의 법칙 또한 잘 알고 있던 터라 순순히 그의 말에 따를 뿐이었다. 침대에 누워 흐느꼈다.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훌쩍이기만 했다. 그렇게 짜디 짠 눈물로 피아노는 영원으로 보내주었다.


    그렇게 여리디 여린 어린잎 같던 아이는 세상의 풍파와 싸워 이긴 서른넷이 되었다. ‘이젠 내 맘대로 살 거야’가 입에 붙어버린 서른넷. 하리보 젤리를 한 박스씩 주문해 질릴 때까지 먹는 어른. 후르트링을 패밀리팩으로 사서 매일 먹는 어른. 날씨가 좋으니 회사를 가지 않겠다는 어른. 퇴사를 하고는 아침 일찍 갑자기 미술관에 가는 어른. 그러니까, 어릴 때 처럼 하고 싶은 건 다 해보는 어른으로 커버렸다. 여느 때처럼 작업실에서 홀로 느긋하게 일을 하다, 창가에 드리운 햇볕에 팔이 따가워질 때 즘 급히 산책에 나섰다. 동네 백수처럼 느릿느릿 정처 없이 동네를 누빈다. ‘오- 이 동네에는 장미가 많네’ ‘오- 여기는 미용실을 개조한 펍이네?’ 하며 걸어 다니다 길 모퉁이에 멈춰 섰다. 까만 현판 위에 우아하게 내려앉은 하얀 글자 ‘성인 피아노’. 온 세상의 중력이 나만 잡아당기는 듯했다. 쉬이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는다.


    마음속 어딘가 자꾸만 두근거려 어린 나를 깨웠다. 수 십 년이 흘렀으나- 한순간에 나는 침대에서 울던 어린아이가 되었다. 애써 태연히 ‘커피나 마시러 가자’ 하다가도, 자꾸만 미련이 생겨 홀린 듯 계단을 올라 학원 문을 열었다. 홀에서 그랜드 피아노로 연주하던 선생님이 나를 맞아주었다. 그때의 원장선생님도 언제나 피아노곡을 연주해 주었다. 저러한 모습으로. 손끝과 발끝, 귀까지 맥박이 쉴 새 없이 뛰어 마치 온몸이 큰 심장이 된 듯했다. 정신없이 상담을 하다가 선생님이 ‘잘 치고 싶은 곡이 있어요? 목표로 하는 곡이라거나, 이런 곡을 잘 치고 싶다거나 하는 거요.’라고 물었는데 일말의 고민도 없이 ‘바흐요. 바흐 프렐류드, 인벤션, 사라방드를 잘 치고 싶어요’라고 대답했다. 여섯 살에 떠나보낸 이름을 외쳤다. 정말 좋아했나 보다. 


    매주 금요일 오후 네시, 그렇게 바흐를 친다. 손가락은 어릴 때처럼 움직이지도 않고, 악보에서 1옥타브가 넘어가면 수학문제를 풀 듯 머리를 굴려야 한다. 평균율 C장조를 처음 치던 날- 집에 가는 차 안에서 수없이 그 음을 흥얼거렸다. ‘도미솔도미솔도미 도레라레파라레파 시레솔레파솔레파’ 단순한 네박자를 흥얼거리며 바보같이 히죽거렸다. 몇 해 전- 심리 상담을 받으며 피아노를 뺏긴 이야기를 하다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상담 선생님은 그때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냐 물었고, 나는 ‘너답게 살면 돼, 굳이 애쓸 필요 없어.’라고 말해주고 싶다 했다.


    사실 피아노를 그만둬서, 바흐를 떠나보내서 지금까지 그리도 서글펐던 게 아니다. 그저 나답게 행복하던 모습,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을 잃어버려 서운했던 것이다. 자아가 자리 잡을 무렵, 나는 ‘세심하고 예민하지만, 결코 나약하지 않은’ 사람으로 크길 원했다. 누군가 말하는 ‘계집애’ 같은 남자애 일 지라도- 축구를 하지 못하는 남자애 일지라도, 그저 나답게 행복한 모습으로 자라나길 바랐다. 그래서 다시, 온 마음으로 바흐를 친다.


    이미 지난 어린 나를, 어른이 된 내가 다시 양육한다.

    서른넷에 다시 바흐를 치며- 너다운 어린이가 되렴.


인벤션을 헤매고 있습니다. 그또한 나다운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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