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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치한 Aug 21. 2023

있잖아, 가끔 엄마가 필요해

  

  7살 된 강아지가 코를 킁킁거리며 훌쩍이기 시작했다. 가끔은 기침을 하기도 하였다. 곧 감기에 걸리거나, 유독 취약한 기관지에 염증이 생긴 것이라 생각했다. 얼마 전에는 눈병이 나더니, 나이가 들면서 이따금 잔병치레를 한다. 강아지가 아프거나 불편한 기색을 내비칠 때면 심장이 덜컹하고 내려앉는다.

    

하릴없는 불안함에 밤을 지새우고는, 해가 뜨자마자 차에 태워 병원으로 향했다. 엑스선 촬영을 해보니 역시나 기관지에 뽀얀 염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약을 처방받고, 네뷸라이저 처치도 시켰다. 선생님과 마주 앉아 강아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내 강아지가 이제는 ‘노견’으로 접어들어 점진적으로 신체기관이 조금씩 안 좋아지는 것이라 일러주었다.


- ‘노견’이요?

하고 반문하자 선생님이 조금 당황한 듯, 친절히 다시 설명해 주길,   

- 강아지의 일생으로 보면 일곱 살, 여덟 살부터는 ‘노견’이라고 표현을 해요. 사람으로 따지면 중장년층이 되는 거죠.


- 아직도 너무 아기 같아서 노견이라고는 인정을 못하고 있었어요 제가. 그러고 보니 올해 유독 잔병치레가 많았네요. 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거겠죠?


    치료를 받으러 처치실로 떠난 강아지를 등지고 대기실로 나와 구석에 멍하니 서있다가는, 시큰한 코를 두 손으로 움켜잡고 눈물을 조금 흘렸다. 당혹스러운 눈물. 갑자기 그러했다. ‘노견’이라는 말이 마음에 콕 박혀서 그러했다. 내 강아지가 늙어간다는 걸 갑작스레 받아들이기가 당혹스러웠던 탓일까, 몇 번이나 훌쩍이다가 그마저도 속상해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 휴지가 자꾸 재채기를 해서 병원에 왔는데, 나이 들어서 그렇대, 노견이라서. 근데 그 말 들으니까 좀 속상했어 엄마.

- 아효, 애기도 늙는구나 서글프게. 속상하지? 그런 게 다 부모 마음이야.


    치료를 마친 강아지를 품에 안고는 ‘형아가 미안해, 근데 우리 강아지는 너무 씩씩하다. 잘했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는지 모르겠다. 모든 게 다 미안했다. 강아지를 처음 만나던 날부터 지금까지 보여준 모든 모습들이 미안해졌다. 특별히 잘못한 일도 없지만, 어느새 내 존재 자체를 미안해하게 되었다. 이게 엄마가 말한 부모의 마음인 걸까?


    강아지는 아프거나 놀라거나 무서울 때면 나를 찾는다. 비 오는 소리를 무서워하는 강아지는, 장마철이 되면 그렇게 더운데도 품으로 파고든다. 몸이 조금 불편하거나 아플 때에도 내 곁으로 와 웅얼웅얼 거리며 울고는 한다. 마치 아프니까 자기를 챙겨달라는 듯이. 강아지가 의지할 구석이 나라는 사실에, 그리고 자기가 아프거나 무섭다는 걸 나에게는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고 있다는 사실이 크게 마음이 놓인다. 


    나는 놀라거나 무서울 땐 엄마를 찾는다. 길에서 넘어질 뻔할 때에도 ‘엄마야!’ 하고 놀란다. 20대 초반, 혼자 자취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집에 벌레가 나왔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엄마를 찾았다. 회사에 다니기 너무 힘들었던 어떤 날의 하루 끝에도, 술에 취해 울면서 엄마를 찾았다. 나에게 일어나는 어떠한 사건이나 사고를 만날 때- 생각할 틈도 없이 엄마를 먼저 부른다.


    우리는, 또 나는 왜 놀랄 때에도, 울 때에도 엄마를 찾을까? 이는 영아기 때부터 시작된 생존욕구에서 시작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한다. 우리가 아주 아기일 때부터 엄마가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고 본능적으로 느낀다고 한다. 나의 생존과 직결되는 일, 그러니까 엄마가 나에게 밥을 먹여준다거나, 가슴을 토닥이며 재워준다거나 하는 일들이 충족되지 못한 채 불편해지면 우는 것으로 엄마에게 알린다고 한다. 넘어지거나 놀랄만할 일, 대수롭지 않을 작은 일들에도 어린아이에게는 큰 위험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엄마를 찾으며 울 수밖에 없다. 그렇게 각인된 ‘엄마’라는 주문은 다 큰 성인이 되어서도 여지없이 튀어나온다. 이따금 넘어질 뻔하며 ‘엄마야!’하고 외치는데, 이는 놀라는 것 자체가 사고판단을 거칠 겨를이 없는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과 느낌이라, 어린 시절 나를 보살피던 엄마의 존재를 무의식적으로 불러 데려오는 행위이다.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 


    나의 할아버지는 지난해 급성 백혈병을 진단받았다. 면역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여러 차례 수혈을 받았지만 차도는 나아지지 않았고 여전히 지난날과는 조금 다른 앙상한 모습으로 나를 마주하고는 한다. 내가 아주 어린 시절에는 할아버지가 나의 아빠이자 엄마였다. 여름날 단잠을 자려 준비하는 나에게 선풍기 대신 부채질을 몇 시간이고 해 주던 사람이다. 내가 울거나 떼를 쓸 때에도 어김없이 나를 달래주던 사람. 마치 지금의 휴지같이, 어린 시절의 나는 기관지가 좋지 않았는데- 새벽녘 콜록이다 울면서 짜증을 내면 할아버지는 따뜻한 차를 주전자에 끓여 조심스레 나를 달랬다. 이마에 붙은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고 아프지 말라며 가슴 언저리를 토닥여주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그때의 나보다 더 여린 모습으로 여전히 나를 반기고는 한다.


    할아버지는 아플 때 누구를 생각할까? 할아버지도 엄마가 보고 싶을까?


    할아버지는 이북 사람인데, 지난한 세월을 헤어진 부모님을 생각하며 살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문득 마음이 저릿해지기도 한다. 할아버지는 한 번도 나에게 가족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잠든 내 옆에서 이런저런 넋두리를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눈물을 벅벅 닦아내 벌게진 채 잠든 내 눈두덩이 위로 할아버지는 자기의 그리움을 함께 흘려보냈을지도 모른다. 다음에 할아버지를 만나면, 할아버지의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물어보고 싶다. 


    약을 먹고 잠든 강아지를 가는 눈으로 바라보며 생각해 본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언제나 보고 싶어 하며 살겠지, 그러니까 누군가에게는 엄마 같은 사람이 되어줘도 좋을 것 같아. 사람들이 즐겁거나 행복할 때에는 아득히 멀어져 있더라도, 아프거나 무서울 때에는 외롭지 않도록. 



일본의 전차역에서 만난 아이는 엄마를 보며 연신 생글생글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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