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고골 : 욕망의 매커니즘> 관극평
8월 4일 관극, 극단 키르코스, 산울림 소극장
니콜라이 고골 : 욕망의 매커니즘
처음 보는 극단, 간만에 보는 연극.
그럼에도 산울림 소극장의, 올해 고전극장 프로그램 중에서도 이 극을 선택한 건 순전히 단편들의 모음이었기 때문이다. 6편의 극 중에 단편을 묶은 극은 이것뿐이었다. 유쾌한 연극을 보고 싶었던 나는, (편견 맞다) 아마도 대륙의 쌀쌀한 바람을 닮은 묵직한 슬픔이 깃든 장편의 스토리를 접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고골의 작품 중 아마 가장 유명할 <외투>로 미루어보아, 약간은 비현실적이고 그렇기에 코믹하고 그러면서도 돌아서면 씁쓸해지는 극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 분위기를 잘 담아내어, 가볍지만 가볍지만은 않은 그런 극이길 바랐다. 다행히, 나의 기대와 바람에 맞아떨어지는 극이었다.
이 극은 <코>, <광인일기>, <외투> 세 극을 묶어 연출한 극이다.
공연을 다 보고 나서야 나는 이 세 편이 선택된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주인공 셋은 모두 러시아의 하급 관리이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고, 경제적으로도 빠듯하며, 그 때문에 무시를 당하거나 존재 자체가 희미해져버리기도 한다. 그런 그들의 포지션은 결국 그들이 원하는 삶과 현실 사이에 크나큰 괴리를 만든다.
세 사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 간극을 해결하고자 한다. 반반한 얼굴을 바탕으로 허세를 부리며 고급 관리인 척하거나(<코>), 자신이 사실은 다른 나라의 왕이지만 지금 잠시 미천한 신분의 관리인 척하는 것이라고 믿어버리거나(<광인일기>), 다른 이와의 소통을 단절한 채 그저 기계처럼 일에 몰입한다(<외투>).
물론 셋 다 건강하지 않은 방식임이 분명하고, (아마도 그래서) 그들은 결국에는 불행해진다.
어느 모로 보나 정상적이지 않은 방식의 해결을 설득력 있게 만든 건, 이 극단의 연기력이다. 인원이 얼마 되지 않는 소수의 극단이지만, 적절한 이미지의 배우 선정과 각 배우의 좋은 연기로 괴짜 같은 행동들을 감정이입이 가능하게 풀어냈다. 자신의 코를 먼발치에서 발견하고 마차를 잡아가며 추격전을 벌이고, '제 코 아니신가요...?'라고 진지하게 물어보는 청년. '저 고급 관리의 딸도 나를 사랑하는 게 틀림없어(사실과 무관한 믿음)'라며 심각한 도끼병 속에서 일기를 적는 남자. 오로지 서류를 정서하는 것만이 삶의 이유이자 기쁨인, 잘 적힌 글씨를 보면 눈이 반짝이는 사무실 직원.
이런 주인공들을 이해할 수 있었던 건 그들의 표정과 몸짓, 목소리 모든 것들이 그럴듯했기 때문이다. 괴짜스럽지만 과잉되지 않은 그들의 연기는 각각의 짧은 스토리에서 나를 몰입시키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예견된) 불행한 결말에도, 이 극은 유쾌함 또한 놓치지 않는다.
<코>는 세 작품 중 유일하게 해설자가 있는 극이었는데, 셋 중에서도 가장 가볍고 덜 불행하게 끝나는 작품이라 맨 앞에 배치했던 것 같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극을 어그러뜨림으로써 관객과 소통하고 재미를 만드는 역할을 했다. 주인공의 행동을 설명하는 척하면서 원치 않는 행동을 강요한다거나,
'(해설) 그에게 말을 건다.'
"(주인공) 싫은데..."
'말을 건다.'
"아, 정말!"
'말을 건다(좋은 말할 때 걸어라)'
"..."
잠에서 깬다고 해설하면서 곤히 자는 주인공의 뺨을 때려 깨워놓고 모르는 척한다거나. 해설자이지만, 관객이 아니라 주인공과 간간이 충돌을 빚으며 소소한 웃음을 만든다.
가장 슬픔이 고조되는 결말의 <광인일기>를 지나, <외투>에서도 유쾌함은 존재했다. 전체적으로 '불쌍하다' 싶은 <외투>에 얼마나 웃음이 있을까 싶지만, 이게 가장 의외의 웃음 포인트였다. 평소보다 훨씬 더 기계처럼 일을 해 겨우 좋은 외투 한 벌을 살만한 돈을 모은 주인공은 외투 수선집에 도착하는데, 갑자기 채플린식 무성영화 조명이 무대에 떨어지면서 주인공들은 대사 대신 몸짓으로만 대화를 한다. 대사는 자막으로(!) 무대 위쪽에 표시된다. 물론 배경음악도 무성영화 시대의 것으로 자연스럽게 바뀐다.
'-표트로비치!' (주인공이 수선장이를 향해 손을 흔든다)
'-250루블이요' (수선장이가 손가락으로 2와 5를 표시하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이런 식의 재기 발랄한 요소들은, 극을 보면서도 간간이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결국엔 씁쓸할 수밖에 없는 전개 속에 약간의 숨 쉴 틈을 만들어주는 느낌이어서 더욱 좋았다.
연출 속의 이런 위트가 마음에 들었지만, 그런 장치가 빛날 수 있었던 건 오히려 다른 순간들에서 이들이 진지했기 때문이다. 가벼움과 무거움의 중심을 잘 잡았던 것이 이 극의 최대 강점이었다고 생각한다. 군데군데 있었던 코믹함과 별개로, 주인공들의 보잘것없음과 슬픔은 계속 깔려있었고 각 배우들은 모두 그에 몰입해있었다.
"왜, 왜들 이러세요..." 하며 (몇 달치 월급 값을 하는) 외투를 막 빼앗긴 주인공의 초라하게 굽은 어깨, 안경 너머로 보이는 울음을 넘어 체념한 듯한 눈빛. 얻어맞아 죽어가면서도 "나는 스페인 왕! 하급 관리로 태어나지 않았어요!"라며 처절하게 외치는 주인공의 목소리, 저 너머의 자신의 왕국을 바라보는 듯한 초점 없는 눈.
그런 것들 하나하나가, 그 순간만큼은 그 장면이 실재하는 주인공의 인생이다, 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러시아 소설을 극으로 재창조하면서, 그 특유의 무거움을 과하지 않게 담아내면서도 적당한 가벼움을 블렌딩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작업을 (물론 내 기준) 성공적으로 해낸 극단 키르코스에게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