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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imee June Youn Mar 21. 2020

9-2. 재기발랄 걷기 한 판

<사람사랑 생명사랑 밤길 걷기> 경험담

2019 08 31, 여의도 한강공원 너른들판


지난 토요일, <사람사랑 생명사랑 밤길 걷기>에 참여했다. 신청은 충동적이었다. 다니던 길에 지하철 광고가 심심치 않게 등장했고(역시 삼성생명), '그래, 나도 죽고 싶은데 걷기나 한 번 해볼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나마 죽고 싶은 마음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변모한 건 좋은 측면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프로그램은 별 건 없었다. 특히 5km를 신청한 나에게 코스는 한강 다리를 한번 건넜다가, 다시 돌아오는 정도였다(그럼에도 나는 다음 날 앓아눕게 됐다). 물론 한강 야경을 보면서 걷는 것도 좋았지만, 사전에 여의도 너른광장에서 이런저런 사전행사에 참여했던 게 의외의 재미를 가져다 주었다.


부스 행사가 있길래, 상담이 끝나고 나는 서브웨이 하나를 입에 문 채 너른광장으로 향했다. 역시나 00생명의전화, 00 상담센터, 00 자살방지센터, 00구세군... 등등 사람의 심리와 자살에 관련된 여러 기관들이 부스를 세우고 있었다. 혼자 온 사람은 매우 드물었고 나는 외로웠지만, 혼자니까 내가 바라는 대로 이리저리 구경다닐 수 있지, 하며 대부분의 부스를 순회했다.

 

대부분 심리에 관련된 검사에 응하거나 질문에 답을 하면 결과를 듣고 상품을 수령하는 이벤트를 진행했다. 나는 온 부스를 돌아다니며 프레비저 카드로 내 강점 찾아보기(맞는 전공과 직업과도 연결된다. 나는 경제학자와 패션 디자인/에디터가 동시에 나온 사례. 너무 극과 극 아닌가요?), 스트레스 체크 리스트 해보기, 그림을 보고 가장 먼저 보이는 동물로 내 성향 알아보기, 간단한 행동유형 검사(나는 안정성에 기준을 두고 행동한다고 함) 등등을 수행했다.

성북구00상담센터의 부스에서 했던 프로그램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한 마디를 적고, 거울 속의 나를 보며 그 한 마디를 해보기. 좋은 문구가 쓰인 책갈피 뒤에 오늘 잘한 일 세 가지 적기(다행히 세 가지가 떠올랐다), 싫은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고 곧 태워질 편지함에 넣기. 나름의 단계를 두고 진행되었는데, 소소하면서도 내 마음의 여러 국면을 건드릴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 좋았다. 부스를 돌고 남는 시간에 나는 책갈피에 끈을 다는 작업을 도왔다. 시간은 뜨고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였다. (이상하게 생각하실 줄 알았는데 흔쾌히 오케이해주셨다.)

00생명의전화 부스를 들여다보니, 나와 계신 분이 뭔가 어눌하지만(죄송해요. 단지 제가 받은 느낌) 굉장히 열심히 설명해주시는 바람에 나는 의도하지 않은 천원 지출을 하고 버튼을 받게 됐다. 진심으로, 좋은 의도로 말씀해주시는 게 느껴져서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 덕분인지 다른 분이 치약 하나를 공짜로 건네주셨다)

특별했던 건 그 곳에 있던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작품. 용산 전쟁기념관과 그 곳에 두 스팟을 두고, 한 스팟에서 녹음된 (수신자가 정해지지 않은) 음성 메시지를 다른 스팟에서 불특정 다수가 수신할 수 있도록 한 작품이었다. 나는 (나라서 그런지...) 우울한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긴장된 마음으로 수화기를 들었지만, '여보세요? 잘 지내고 있지? 결혼하면 초대해야지~' 라는 매우 일상적이고 발랄한 메시지가 들어와서 약간 맥이 풀렸지만 다행이라 생각했다.

여러 리플렛이 각 부스에 놓여있었지만, 눈이 갔던 건 자살을 생각하는 당사자가 아닌, 자살 유가족들에 대한 리플렛들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들에 대해 어떤 심리적인 위로가 이루어지고 있을지 궁금했다. 외국에서는 그것도 하나의 전문적인 분야로 구축이 되어 있다던데(분야 이름도 알았는데 까먹음). 이상하게 나는 이런 문제에서 당사자보다도 그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 퀴어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듯이.


시간이 흐르고 유콘(UCON) 관계자와 함께 맨손체조를 끝낸 후 5km 출발을 위해 대기를 하고 있었다. 유콘은 뛰는 것으로 기부를 하는 단체라는데, 잘은 모르지만 정말 좋은 시도라고 생각했다. 대기를 하다보니 자연스레 주변 사람들이 붙이고 있는 스티커 피켓에 눈길이 갔다. 나는 '나의 길은 결국에는 해피엔딩 길 : 걷는 사람도 걷지 않는 사람도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라고 (비교적 진중하고 센치하게) 적고 새침하게 서 있었는데, 내 주변엔 내 예상을 깨는 문구들이 가득했다. '우리 가족 모두 힘내고~', '제가 있어요. 힘내세요' 정도야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의 길은 밥 먹으러 가는 길 : 5km는 금방 가요.' 부터 시작해서 '롯데가 우승할 때까지!', '말 걸어주세요. 전 착해요~(하트)', '오빠들 연락주세요. 010-XXXX-XXXX' 와 같이 온갖 재기발랄한 문구들이 가득했다. 이런 데 와서는 좀 진중하고 심각해야 하는 거 아니야? 라는 나의 생각이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생명사랑 걷기를 실천할 수도 있구나. 오히려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또 하나를 배웠다.


걸으면서도 나는 외로웠다. 나 외에는 대부분 둘셋씩 짝을 지어 그들만의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고, 혼자 걷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은 왠지 말을 걸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나도 그렇게 보였을까?). 이렇게 주변에 말들이 많구나, 역시 토요일 저녁 여의도에 5km 코스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하면서 묵언수행하듯 걷게 됐다. 반 정도 걸을 때만 해도 주변의 소리들에 휩쓸리듯 걸어가며 간간이 풍경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반쯤 지나고 조금 숨이 가쁘고 힘들다는 느낌이 오면서, 오히려 머리는 좀 더 조용해 진 것 같았다. 그 때에야 나는 외로움이나 조급함이 조금 잦아든 상태로 주변 풍경을 보며 나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게 됐다. 그냥 걸었다. 그리고 그게 상쾌했다. 바람도 적절하게 불어줬고, 야경이 아름다웠다. 몇년 전 비슷한 길을 함께 걸었던 사람을 떠올렸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곧 따로 적어보려고 한다.) 돌아오는 다리 위에서, 나는 밤길 걷기와 히야에 대한 생각을 적어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직 공연이나 전시를 봐도 크게 뭔가를 적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는데, 오히려 밤길 걷기 행사에 대해 적고 싶어졌다는 건 나도 의외였다.


무릎과 다리가 좋지 않은 탓에 조금 아팠지만, 그래도 이 행사를 겪은 건 괜찮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는 연 이틀을 몸살에 비염으로 누워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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