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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imee June Youn Mar 21. 2020

12-10. 창작산실 <삼대의 판>

191221 19시, 천하제일탈공작소,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감상한지 너무 오래된 시점에 글을 쓰려니 참 답답하다. 인상이나 감동이 많이 옅어졌다. 역시 늦지 않게 기록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담을 하면서 내가 감상에서 기록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그렇게 설레어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러나 기록은 내게 도움이 될 거다. 나의 필요이자 콤플렉스이고 이제는 빚이기도 하니까.


 창신소통공작소에서 알게 된 목공예 아티스트 선생님께서 참여하신 극이라 가 보게 되었다. 내 생애 첫 창작산실이었다. 항상 궁금하지만 멀게 느껴졌던 축제였다. 대학로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 혜화역부터 시작해서 대학로 곳곳에 붙은 창작산실 홍보물들을 못 본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항상 신진 작가들의 작품이라는 것, 너무 많은 작품들이 짧게 공연한다는 것, 과도하게 예술적이고 어려울 것 같다는 선입견 등등 여러 생각 때문에 그냥 포기하곤 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극은 나의 선입견을 여러 방면에서 깨 준 극이었다. 상연 기간만 좀 길었다면 다른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을 정도로. 그리고 나는 이 극단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됐다. (이 말 한마디면 충분하지 않을까?)


 탈춤이라는 전통연희에 나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제대로 본 유일한 창극이 <변강쇠 점 찍고 옹녀> 하나 뿐이었으니까. (매우 좋은 작품이었다.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전통 예술이란 이런 것! 의자 다섯 개 ^_^)

그리고 의아한 부분도 있었다. 배우의 연기란 분명 목소리와 발성, 몸의 움직임과 더불어 표정까지 아우르는 것일 텐데, 표정이 하나뿐으로 고정된 탈을 얼굴 앞에 두고 연기를 펼친다는 게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탈의 존재가 인물의 캐릭터를 제한적으로 만들어버리지 않을까하는 걱정도 들었다.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 탈이 방해가 되었느냐하면, 결론적으로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탈이 없는 이 극을 상상할 수는 없다. 분명 탈에는 한 가지 표정뿐인데, 등장인물의 동작과 대사를 듣노라면 마치 탈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은 착시를 경험하게 된다. 탈춤이라는 특수한 장르에서 발달한, 감정을 표현하는 몸짓 언어가 섬세하고 교묘하게 작동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탈을 쓰신 배우분의 어깻짓, 발짓, 고갯짓, 손가락 하나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시시각각 그 인물의 상황과 정서를 드러내고 있었다.


 탈의 묘미를 하나 더 말한다면, 캐릭터를 제한한다기보다 오히려 극 속에서 전부 드러나지 않는 정보들을 설명해 준다는 것이다. 모든 탈춤이 이런 형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극은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연극보다도 더 쇼잉showing의 방식으로 풀어낸 극이었다.

 염상섭의 <삼대>는 조씨 가문 세 인물의 일대기를 세세히 풀어낸 작품이다. <삼대>의 일대기 속 사건들은 시간의 흐름 순서대로, 나름의 인과관계를 바탕으로 각 인물과 사건에 대한 세세한 설명과 함께 읽히게 되어 있다. (정확히는 그런 책이라고 알고 있다. 그래서 끝까지 읽기가 힘들다. ㅋㅋ)

탈춤으로서의 <삼대의 판>은 몇몇 핵심적인 장면을 골라 보자기를 엮듯이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마치 전체 이야기를 잘게 쪼갠 다음 중요한 사건들의 토막만 빼내어 다시 짜맞춘 것처럼, 기묘하게도 사건들 사이사이의 링크를 거의 제공하지 않는 극이었다. 대신 특정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순간적 정서와 행위에 주목하면서, 한 장면 한 장면을 따라가다보면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과 더불어 각 인물에 대한 확실한 이미지가 그려지게끔 만들었다. 관객은 몇몇 주요한 사건들을 그때그때 실감나게 즐기면서, 그 사건들의 배경과 사건 사이의 연결고리에 대한 정보는 나레이션과 탈의 표정, 배우들의 몸짓과 대사에서 얻게 된다.  각 인물에 대한 꼭 필요한 기본정보 정도만을 그나마도 나레이션으로 전달하고, 인물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몇몇 에피소드들과 삼대의 일대기 중 주요한 사건들 몇몇만 추려 장면장면을 생동감 있게 보여주는 데 주력했다. 대신에 장면 하나에 해당하는 시간도 길고, 장면 하나 속에 들어가는 정보가 매우 많고 세세했다.

 이미 완결된 글에서 특정한 문장만 선택하여 다시 재배열한다면 아마 비슷한 시공간적 배경과 인물, 주제를 가져왔을 뿐 사실상 다른 글이라고 느껴질 것이다. 이 극도 그랬다. <삼대>라는 줄거리와 인물의 특성, 그에 등장하는 몇몇 모티브를 가져와 새롭게 만들고 편집한, 사실상 다른 작품이라는 느낌이었다. 탈춤에 맞게 가공된 그 토막난 장면들의 짜깁기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장면장면에 생동감을 부여함으로써 자칫 고리타분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내용을 흥미롭게 풀어냈고, 그게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조의관이 족보를 매매해서 양반이 된다>는 것에 대한 설명을 책에서는 '그 시대에는 족보를 매매하는 것이 유행했고, 조의관은 양반이라는 지위에 오르고 싶은 약간의 허영심과 명예욕이 있었다. 그는 그간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재산을 축적했는데, 그 돈의 상당수를 들여서 족보를 샀고 매우 기뻐했다'는 식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극이라 하더라도 조의관이 재산을 축적하는 과정, 족보를 사는 장면, 족보를 사기 전과 후의 세간의 반응 등등 수많은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스토리텔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극은 조금 달랐다. 그 모든 정보를 끊기지 않는 한 장면(말하자면 원테이크)에 담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세세한 설명과 인과관계를 제공하진 않지만, 상징적인 소품들 몇 개와 인물의 감정 표현, 대사 정도에서 그 부분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관객이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돈이 많이 들어있을 것 같은 큰 궤짝 하나와 족보로 보이는 큰 책의 등장, 들떠있는 조의관의 몸짓과 대사, 정자관처럼 보이는 모자를 쓰고자 하는 그의 행동 등 여러 요소를 무대에 등장시킴으로서 이야기를 짜맞추는 것이다.

 경애를 둘러싼 두 부자(상훈과 덕기)의 관계에 대한 설명도 그랬다. 한 장면에서 매력적인 얼굴의 경애, 그를 보고 먼 발치에서 꽃을 들고 설레어하는 덕기의 모습을 보여준다. 조의관의 족보 매매 장면처럼, 이 장면에서도 경애가 매력적인 여성이라는 것과 덕기가 얼마나 설레어하고 있는지를 주로 보여준다. 둘의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만 나레이션으로 나올뿐, 그 둘이 어떤 시간을 함께 보냈으며 어째서 호감을 갖게 되었는지 등의 인과적 설명은 거의 없다. 그리고 그 다음 장면에서는 경애 주변을 상훈이 맴돌다가, 어둡고 불안한 조명 속에서 경애를 끌어안고, 경애가 아이를 출산한다. 그 장면에서도 역시 어쩌다 둘이 밤을 함께 보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이, 그저 경애가 불안정한 심리상태이며 상훈은 어느 정도 음험한 의도를 가지고 그에게 접근했음을 몸짓과 음악, 조명 등으로 단지 보여줄 뿐이다.


 이 극에서 또 하나 새로운 점을 짚자면 무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탈춤이라는 전통 연희는 마당극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는 곧, 본래 야외를 기반으로 하는 예술이라는 것이다. 6차 교육과정을 밟은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국어 교과서 속에서 양반에게 어퍼컷을 먹이는 말뚝이와 그 재기발랄한 표정의 탈을 기억할 것이다. 고르게 다져진 흙바닥 위에 탈을 쓴 배우들, 그 주변을 겹겹이 둘러싼 관객들의 호응, 이런 것들이 전형적인 탈춤의 요소이다. 

 이 극은 그 형태를 탈피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탈춤이라는 형태를 그대로 실내 극장, 심지어 소극장으로 옮겨왔다. 그 과정에서 간소화된 무대와 음악, 조명 등 현대적인 장치가 들어오게 되었다.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탈춤이라는 형식이 소극장의 무대와 잘 어울릴까 했는데, 무대 장치를 굉장히 절제해 사용함으로써 작품의 매력을 배가시켰던 것 같다. 무대 자체도 바닥과 벽을 새하얀 종이 하나로 대체하여, 극도로 미니멀한 배경 위로 탈과 소품들, 인물들의 움직임이 잘 보이는 역할을 했다. 조명도 등장인물의 정서의 변화를 나타내거나 극적인 장면에서의 충격을 배가하는 도구로 쓰였으며, 은은한 푸른색 혹은 노란색으로만 거의 모습을 드러냈다. 한 시간 반 가까이 되는 상연 시간 중에, 원색에 가까운 빨강과 파랑 조명이 무대 위로 떨어졌던 건 딱 한 번이었다. 음악 또한 배경음악이라기보다는 사실상 효과음에 가까웠다. 깔린 음악 자체가 없는 순간도 많았고, 있다 하더라도 조명과 마찬가지로 인물의 정서나 극적인 사건에 효과를 더하는 느낌이었다. 


 이 극의 재기발랄함을 느꼈던 부분 중 하나는, 악기를 전통적인 것만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장구나 북, 피리(정확한 악기를 모름) 등이 기본이 되긴 했지만, 서양적인 보컬 발성과 창 발성의 중간적인 목소리나 일렉트릭 기타의 연주 소리 등 새로운 소리들을 포함시켜 오히려 천편일률적이지 않은 느낌을 줬다. 심지어 의도적으로 하울링까지 효과음으로 사용하는 것을 듣고 매우 놀랐다. 전통연희에 하울링이라니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조합은 아니지 않은가.

 재기발랄함으로 따지면 인물들의 연기도 한몫했다. 토막내어 세세하게 만들어진 장면들에 몰입하면서도, 그때그때 등장하는 유머 덕분에 더욱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기억나는 장면은 이것이다. 조의관이 죽으면서 돈 궤짝을 끌어안는 모양으로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 자체도 충분히 익살스러웠지만 그 뒤가 더 기가 막혔다. 죽은 아비의 재산을 탐낸 자식들이 시신(사실은 움직이지 않는 배우)보다 궤짝을 먼저 치워버리는데, 그 궤짝을 끌어안은 모양 그대로 손과 팔이 계속 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의 유머였기에 관객들 대부분이 웃음을 터뜨렸다.


 장면들 사이의 인과보다 장면들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그린 만큼, 인물의 행위는 아무래도 단편적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가장 적은 사건들에 포함되어 있었던 조의관은 족보 매매 이외의 활약을 보이지 않고 일찍 죽었고, 상훈에 얽힌 사건이 가장 많이 그려진 만큼 상훈이라는 인물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가 가장 많았다. 그런데 그 사건들이 대부분 세간의 평가에는 신경쓰면서 막상 뒤에서는 가족은 돌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그의 특성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사건들이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상훈이란 인간 자체가 안하무인에 전형적인 악인인 것처럼 그려졌다. 그게 아마 이 극의 한계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 극은 다른 장면에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는데, 의외로 덕기라는 인물에서 그렇다. 원작에서는 차라리 상훈이 덕기보다 더 복합적으로 그려졌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이 작품은 덕기를 오히려 복합적으로 그림으로써 열린 결말과 인물의 복합성 제시라는 두 가지 성과를 얻었다. 극 속에서 경애에 대한 사랑, 아버지와의 갈등 두 장면 외에는 덕기를 포함한 큰 사건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삼대 중에서도 가장 단편적으로 그려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극을 보았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상훈이 죽고 경애가 아닌 다른 여인과 결혼한 채로 돈 궤짝을 상속받은 덕기는 특유의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의 탈을 쓰고 전에 없이 수상한 몸짓을 보이며 궤짝을 끌어안는다. 불과 몇 장면 전에서 탐욕스럽고 앞뒤가 다른 행동을 하는 아버지를 비난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극이 끝나고 물어보니 연출가의 의도와 맞아떨어진 해석이었다. 오히려 덕기라는 인간의 극적인 변화를 보여줌으로써 또 한번 뻔하지 않은 극적 효과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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