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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imee June Youn Mar 21. 2020

1-3. 문화역서울284 <호텔사회> 전시

200111, 문화역서울284

 어쩌면 크게 별 건 없었던 전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괜히 끌리는 것을. 전시 매니아라고 할 정도로 많은 전시를 보러 다니지는 않지만, 간간이 서울의 주요 국공립 미술관들에 관심을 두고 있는 편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문화역서울284(이하 284)를 좋아한다. 왜냐고? 좋아하는 이유를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겠나요.

 이전에 관람했던 전시 중 기억나는 건 <여가의 기술>, <은밀하게 황홀하게>이다. 모두 나름의 즐거움을 주었다. 그 전시들에 대해서도 아마 언젠가는 적고 싶을 것 같다. 이전에 감상했던, 그냥 잊긴 싫은 다른 작품들처럼.

 나는 284의 매력 중 하나는 일상에 닿아있는 전시를 끊임없이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가의 기술>은 그런 강점이 극대화된 전시였다. 여가 실태에 대한 통계 자료부터, 다양한 여가의 형태를 반영한 설치 혹은 참여형 작품들이 나름의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각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면 그에 따라 소리와 빛이 한가로운 풍경 속에 생겨나는 인터랙티브 아트, 방문한 사람마다 한줄씩 덧붙여 하나의 글을 완성하는 타자기, 천장에 흘러가는 문장들을 보며 빈백에 누워 그야말로 여가를 즐길 수 있게 만드는 공간들을 한 전시에서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내게 새롭게 느껴졌다. 외국에 가서도 현대미술관을 굳이 찾아갈 정도로 호불호가 뚜렷한 내게 꽤 취향에 맞는 전시 취지와 기획이었던 것이다. 아마 <은밀하게 황홀하게>를 관람하고 나서 우연찮게 284 내부에서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도 나는 가감없이 나의 284에 대한 사랑과 기대를 말했다. (그때 번호를 알려주셨던 전시기획자님... 연락을 드려도 될까요..?)


 284의 전시가 항상 최고의 퀄리티라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역을 개조했다보니 공간 활용에도 한계가 크고, 전시된 것들 사이에 긴밀한 연관관계나 흐름이 항상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한 가지 주제를 공유하는 여러작품들이 산발적으로 모여 있는, 조금은 성긴 전시인 경우가 많다. 매력적인 부분이라고 한다면, 연결 고리가 느슨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사이사이에서 느껴지는 의외성이 큰 즐거움이다. 그리고 아마도 주제 외에 표현 방식에는 거의 제한을 두지 않는지, 어떤 방법이나 기술, 도구를 사용하였을지 예상할 수 없는 즐거움이 있다. 거의 매 전시에서 설치, 영상, 퍼포먼스 등 굉장히 다양한 기법을 활용한 작품들을 만나왔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 또한 생활과 밀접한 것을 주제로 삼은 전시였다. '호텔'이라는 것이 옛 서울에 처음으로 출현한 이래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로 자리잡아 왔는지를 다양한 방식의 작품으로 제시한다는 설명을 읽고, 역시나 이번에도 생활과 닿아있는 284만의 전시를 즐길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갔다. 더 재미있는 경험을 위해서 일부러 전시장에서 퍼포먼스가 펼쳐지는 시간에 맞추어 전시장을 찾았다. 하하!

 이번에도 역시 성긴 그물망같은 여러 작품들이 옛 서울역사 공간에 각각 전시되어 있었다. 호텔 게이트처럼 장식된 입구부터 기대감을 한껏 올려주었다. 옛 호텔 뷔페와 객실처럼 꾸며진 공간, 호텔 밖 정원 같은 식물 장식들을 뚫고 나오면 실제 서울에 존재했던 여러 호텔의 사진과 관련 홍보물 및 영상 아카이브를 보며 실재했던 호텔들의 모습을 간접적으로나마 실감할 수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조금 더 매니악하고(?) 새로운 작품들이 있다. 1층에서 대략적인 전시의 맛을 보여주고 2층에서 심화시키는 284의 패턴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번에도 역시 방마다 각기 다른 색채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경성 때부터의 역사를 간직한 <호텔 284>에 대한 페이크 다큐, 호텔을 배경으로 하는 다양한 영화 장면들과 그 앞에 무작위로 서 있는 캐리어들, 심지어는 대규모의 매트리스 위 자유롭게 누워 아스트랄한 전자 음악을 자장가 삼아 잠을 즐기는 어두운 방까지,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즐길 수 있어서 좋았다. 284는 항상 예상하지 못한 재기발랄한 작품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날엔 앞에서 말한 '특정 시간에 펼쳐지는 이벤트' 두 가지를 즐길 수 있었다. 물론 일부러 노리고 간 거다. 하나는 호텔 벨보이들이 돌아다니는 퍼포먼스로, 정해진 시간 안에 벨보이 두 명이 호텔 직원 제복을 입고 전시장 전체를 돌아다니는 것이다. 둘이 큰 캐리어 하나를 들고 뛰어다닌다. 그런데 넓은 데다 2층까지 있는 건물에서 바쁘게 돌아다니는 두 사람을 마주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어서, 거의 전시장 전체를 돌아보고 내려왔을 때에야 먼 발치에서 제복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고풍스러운 호텔 로비처럼 꾸며진 1층 한가운데에 높이 설치된 계단 맨 위에서 제복 자락이 보이더니...

"손님 안녕하십니까! 호텔 284입니다!"

그 뒤로 나는 이들과 맞닥뜨리기를 매우 고대했지만 쉽지 않아, 눈여겨 봐둔 다른 즐길거리로 먼저 향했다. 정해진 날짜에만, 하루에 두 번만 번호표를 받을 수 있는 호텔 284의 칵테일을 마시기 위해 일찌감치 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것이 <호텔사회> 전시의 두 번째 이벤트였다. 그렇게 사람이 꽤 모이게 되자, 서비스 차원이었는지 그 두 직원이 굉장히 다급하게 바 근처로 오더니 몸을 곧추세웠다. 둘 중에 캐리어를 들고 있지 않은, 그나마 더 높은 직원이 큰 소리로 천연덕스럽게 외치는 것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호텔 284입니다! 손님 여러분이 편안하게 숙박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그리고 돌아나가다가, 갑자기 캐리어를 들고 있던 직원이 발을 헛디뎌 바닥에 철푸덕 엎어졌다. 높은 직원이 그의 몸을 두드리며 "이봐! 정신차려! 빨리 일어나 가자!" 하며 허둥지둥.

우렁찬 인사야 아까 본 거라 예상했지만, 넘어지는 것까지 퍼포먼스일 줄은 전혀 모르고 있다가 정말 깜짝 놀랐다. 그 세세한 기획에 무릎을 쳤다고 할까. 정말 멋있었다. 나는 워낙에 예상치 못한 퍼포먼스나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양방향 작품을 좋아하는 편이니까.

 그러고 나서 나는 패션후르츠 리큐르와 탄산수가 들어간 트로피칼 칵테일을 마시며 전시회 관람을 마감했다. 호텔이라는 주제와 수영장이라는 그 공간의 테마에 너무 어울리는 매우 산뜻한 맛이었다. 특정한 시공간에서만 즐길 수 있는 이벤트, 그 속에서 내가 참여하고 또 대접받고 있다는 느낌, 나는 이런 것에서 소소한 행복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유명하거나 깊이 있는, 혹은 철학적인 작품들로 철저하게 설계된 전시에서는 받을 수 없는, 284의 전시만이 줄 수 있는 재미와 느낌이라는 게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보통 '전시'라고 하면 떠올릴 법한, 유명 작가의 작품을 늘어놓는 방식의 전시를 이 곳에서 택하지 않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관객의 삶에 와 닿는 주제를 선정하고, 그 주제를 다양한 기법으로 접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작품들을 섭외하여 성기게 배치해두는 그 기획과 형태 자체를 나는 좋아한다. 다음 전시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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