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4일 19시 30분, 학전블루 소극장, 김민기 연출, 정재일 음악
'정재일이 한 건 했다.'
공연을 보면서 가장 먼저, 그리고 내내 들었던 생각은 그것이었다.
좋은 공연을 보게 되었을 때, 나는 공연에 몰입하면서도 동시에 누군가에게 이 공연에 대해 말하게 된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하게 될까, 생각하곤 한다. 좋은 공연일수록 누군가에게는 알리고 싶은 마음? 이 좋은 걸 나만 볼 수는 없다, 너무 아깝다는 생각? 어찌 되었든 머리를 투트랙으로 마구 굴리게 된다.
계단형 무대를 사이에 두고 그물망 뒤로 밴드의 실루엣이 보이고 그때그때 핀조명을 떨어뜨리는 연출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밴드의 플레이가 보이는 것도 공연의 톡톡한 재미였지만, 그건 부수적인 것이었다.
결코 음악을 잘 안다고 하지는 못하겠지만, 편곡이 정말 멋있었다. 멋있었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지하철 1호선>은 역사가 오랜 뮤지컬이고, 지금에 와서도 1980년대의 서울을 배경으로 한다. 이전에 이 공연을 봤던 적은 없지만, 아마 초창기의 구도를 거의 그대로 가져왔을 거라 생각한다. 포스터의 기본적인 시안도 그대로인 만큼, 등장인물, 시공간적 배경, 심지어 그 시기에만 쓰였을 법한 단어들과 말투까지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창작된 지 10여년이 지났지만, 리메이크라고 볼 만한 요소가 거의 없었다는 뜻이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작년과 올해, 10년만에 다시 무대에 올려진 <지하철 1호선>을 보러 온 사람들은 당연히 원작을 보러 오는 것이다. 나도 그랬고. 대부분의 관객은 김민기 연출이 구상했던 그대로를 보길 기대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지하철 1호선>은 그런 관객들의 니즈를 관통하고 있는 극이다.
이런 전제 하에서, 이 공연에 쓰이는 음악 또한 기본적인 멜로디나 가사가 바뀌지 않은 것은 너무 당연하다. 지금 와서는 약간 올드하게 들릴 수 있는 멜로디나 어색할 수 있는 조어가 있더라도 말이다. 아직 <지하철 1호선>은 그 시대 서울의 정서를 담아내야 하는 극이고, 그것이 지금에 와서도 충분히 의미를 지닐 수 있으니까. 주인공 '선녀'가 연변에서 막 건너온 소녀로, 연변 사투리로 80년대의 서울내기들과 대화를 하는 게 이질적이더라도, 그들이 찾아 헤메고 바라마지 않는 서울의 모습은 지금도 유효하니까. 그런 서울은 아직 존재하지 않으니까. 지금도 노량진 수산시장에는 강경 진압에 나뒹구는 포차의 테이블들이 존재하니까.
거의 모든 인물이 최소 한 번 이상 자신의 마음을 담은 노래를 부르고, 주요한 사건 중간중간, 심지어 상황이나 장면이 전환될 때에도 노래가 들어가는, 이러한 극에서 음악은 너무도 중요하다. 소극장 뮤지컬을 몇 번 보았지만 그 중에서도 노래의 역할이 꽤 큰 극이었다고 생각한다.
음악감독 정재일은 작년에 새로이 이 극의 음악감독을 맡았다. 정재일의 지난 커리어와 화려한 협업 경력을 새삼스레 들먹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들먹이기에는 사실 너무 방대하고 난 잘 모른다). 멜로디와 가사가 고정된 상태에서 그가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건 편곡이었다. 그리고 그게 음악적인 최대의 승부수였다. 정재일은 이번 극에서, 편곡의 힘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러프하게 말하자면, 전반적인 노래에서 촌스러운 느낌이 없었다. 멜로디와 가사를 그대로 가져왔음에도, 화성이나 템포의 변주를 통해 세련된 느낌의 곡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건 오롯이 편곡자의 역량이라 해야 할 것이다.
덧붙여 새로운 노래가 나올 때마다 그때그때 귀가 매우 즐거웠는데, 그건 그가 편곡에 장르적인 변화를 더했기 때문이다. 80년대 서울에서 유행했을 법한 노래를 생각하자면 블루지한 선율이나 라틴을 기반으로 한 탱고나 보사노바 리듬을 먼저 떠올리기는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선대 뮤지션들이 음악적인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게 주류라고 하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30년대에도 김해송 님은 있었으니까.
정재일은 자칫 천편일률적일 수 있었던 분위기에 장르적인 시도를 통해서 다양한 색채를 더했다. 처음에 라틴 리듬으로 기타가 흐를 때는 잠깐 당황했다. 이 뮤지컬에 이게 어울릴까? 80년대 서울을 담은 이 무대에? 그렇지만 원래 있던 곡조와 너무도 잘 붙는 세션에 나중에는 감탄을 연발하며 공연을 즐길 수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계속 기대가 되었다. 이번엔 어떤 악기가 어떤 풍의 선율로 노래를 시작할까, 어떤 화성의 변화를 줘서 또 세련된 느낌을 선사할까.
극이 던지는 메시지, 등장인물들의 연기, 앙상블의 안무, 무대 구성,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게 없었지만 가장 멋있었던 부분을 꼽으라면 단연 음악이었다. 라이브로 매 공연마다 모든 곡을 소화하는 세션들의 실력을 포함해, 음악의 다채로움과 멋진 편곡이 나를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무대를 전반적으로 볼 수 있는 좌석에서 음악을 다시금 즐기기 위해, 조만간 다른 자리로 다시 예매를 해 보러 갈 생각이다. 2018-2019년판 OST 앨범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사고 싶지만, 아직 음원조차 출시가 되지 않아서 초연 때의 노래집만 구매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이 글은 아직 아무도 볼 수 없는 글이지만, 부탁이니 이번 OST는 출시를 했으면 좋겠다. 정재일의 편곡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