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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좋아서 지겹도록 봤던 영화

N차는계속됩니다.

by 플레이

음악감독으로서 현업에 종사할 때, 그리고 더 이상의 음악 작업을 하지 않는 지금까지도 어디에 가서 누군가에게 내 전공과 종사 분야를 소개할 때면 마치 짜인 시나리오처럼 돌아오는 뻔한 이야기들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상대방의 질문이 내 귓가에 닿는 순간 '올 것이 왔구나!' 하며 기다렸다는 듯 막힘없이 술술 이야기보따리를 풀게 되는 바로 그 질문.


당신이 뽑은 인생 영화(or 음악)는 무엇인가요?


이 Best of Best를 묻는 질문은 비단 나만 받아봤던 것은 아니리라 짐작한다. 나 역시 여러 번 진행했던 타 음악감독들과의 인터뷰에서 나름의 공식 질문처럼 꼭 한 번은 물어봤었고, 같이 음악을 작업하던 내 동료들은 물론이거니와 영화를 사랑하는 씨네필까지, 혹은 전공과 직업을 막론하고 삶과 영화가 얽혀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이 질문을 들어봤을 것이다.


물론 위대한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숱하게 쏟아져 나오니 '하나의' 영화만 콕 집어서 말해달라면 조금 난감하기도 하다. 하지만 뭣 하나 빠짐없이 다 잘난 소듕한 내 새끼들 속에서 어떤 녀석을 소개할지 고민하는 행복한 찰나의 순간도 있었으니, 오늘은 <음악이 좋아서 지겹도록 봤던 영화>라는 주제로 리스트를 짜 볼까 한다. 다만 개인의 취향은 별개의 영역이므로 '아 이영화 별로였는데...' 혹은 '흥행이 폭망 했는데 뭐라는 거야' 등과 같은 악플로 필자의 마음에 스크래치를 내는 것은 삼가주시길 바라며 텍스트 중간중간 첨부해 둔 링크가 있으니 글씨 색갈이 요상하다 싶으면 한 번쯤 눌러도 보시고, 언젠가 불시에 업데이트로 굴비 엮듯 다른 곡들이 늘어날 수 있으니 혹여 취향이 같은 분들이 있다면 하트로 따듯한 연대를 표해주시길.






<아가씨>(2015)

음악감독: 조영욱 The Soundtrackings

추천넘버: "후지산 아래서 온 저 나무", "결혼식"


한국영화에서 이토록 미니멀스러운 유럽풍 음악을 듣게 되다니 하고 놀랐던 OST. 직접 작곡을 하지는 않지만 슈퍼바이징만큼은 국내 최고라는 조영욱 음악감독 덕인지, 아무래도 박찬욱 감독 작품들은 미장셴이 중요하다 보니 음악도 그만큼의 색깔이 짙게 나와줘야 하니 그런지, 영화와 너무도 찰떡으로 맞아떨어지는 악기 구성들이 곳곳에서 돋보이는데 특히 "결혼식"은 스트링군 하나하나가 조근조근 말을 걸다 결국 모여 다 같이 왁 하고 터져버리는 느낌이다. 히데코와 숙희가 탈출에 성공해 대 평원을 달리던 씬에서의 카타르시스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킹콩>(2005)

음악감독: James Newton Howard

추천넘버: "Central Park", "The Empire State Building"


1933년 개봉한 오리지널 <킹콩> 이후 쏟아진 많은 아류작을 가뿐히 누르고 가장 우수한 흥행 성적을 거둔 피터 잭슨 판. 콩을 이용하려는 인간의 추악한 모습과 털 한올까지 바람에 흩날리는 CG는 지금 다시 봐도 훌륭하다. 특히나 콩과 앤(나오미 왓츠)이 뉴욕에서 재회하는 씬은 결국 콩이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듯 제임스 뉴튼 하워드 특유의 서정적인 선율로 채우는데(앨범 커버로 선정된 저 장면이 바로 "Central Park"가 흐르는 씬) 영화음악사를 통틀어 *러브테마의 기능적 측면에 가장 가까운 곡이라 할 수 있다.


*가장 따듯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어야 할 때 쓰는 곡. 연인관계는 물론이고 가족, 군신관계, 인간과 동물 사이 등 널리 두루 쓰인다.





<타이타닉>(1998)

음악감독: James Horner

추천넘버: "The Portrait", "An Irish Party In Third Class"


이제는 고인이 되어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음악감독 제임스 호너. 제임스 카메론 감독과의 인연도 깊은지라 제작 당시 둘 사이에서 벌어진 재밌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 로즈(케이트 윈슬렛)의 초상화를 그리는 씬에서 흐르는 "The Portrait"에 얽힌 일화가 재밌다. OST는 송타이틀인 "My Heart Will Go On"때문에 3천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지만 사실 3등실에서 열리는 파티씬 속 "An Irish Party In Third Class"가 제대로 된 켈틱 음악을 느낄 수 있었기에 진짜 1등 공신이라 할 수 있겠다. 음악으로 보나 영화적인 측면으로 보나 '단순히 신분 차이를 극복하려다 비극으로 치닿는 사랑 이야기'라고 정립하기엔 전경과 배경 모두를 비춰주는 카메라 무빙까지도 너무도 훌륭했던지라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작품. 필름 콘서트를 끝내 가지 못하고 제임스 호너의 부고를 듣게 돼 안타깝고, 또 안타깝다.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2015)

음악감독: Joe Kraemer

추천넘버: "Finale and Curtain Call"


오페라의 주 기능은 서사이다. 때문에 영화에서 주인공이 오페라를 관람하는 씬은 고전부터 현대를 막론하고 클리셰로 자주 이용되는데, 해당 오페라의 서사가 영화 전체의 스토리를 함축하고 있거나 해결의 실마리로 작용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에서 등장하는 오페라 '투란도트' 역시 에단(톰 크루즈)과 일사(레베카 퍼거슨)가 처한 상황과 서사를 상징한다. 음악감독 조 크래머는 "Nessun Dorma"(공주는 잠 못 이루고)의 선율에 미션 임파서블의 메인테마를 녹여 자연스레 흘려보냈다. 그것도 영화의 후반부, 두 사람이 작별 인사를 고하는 씬에서 말이다. 많은 거장들이 영화음악의 꽃이 메인테마라고들 했지만 개인적으로 언더스코어 역시 배제할 수 없는 매력이라 자부하고 싶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마냥 흘러가는 것 같으면서도 악기 하나하나가 청중에게 말을 걸듯 살아있는 라인을 느낄 수 있을뿐더러 결국 그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익숙한 메인테마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 곡 역시 그렇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5)

음악감독: Alexandre Desplat

추천넘버: "Mr. Moustafa"


내게는 알렉상드르 데스플라라는 음악감독을 처음 알게 해 준 작품이자 당사자에게는 첫 오스카 음악상을 안겨준 영화. 미쟝셴만큼이나 음악에서도 색채감이 돋보이는데 유럽풍의 미니멀을 그대로 담고 있어서 음악만 따로 떼어 놓고 봐도 동유럽 곳곳의 명소들을 연상시킨다. 메인 악기 선택 또한 그만의 탁월한 센스가 돋보인다.










<캐롤>(2015)

음악감독: Carter Burwell

추천넘버: "Opening", "Letter"


미니멀의 대가 카터버웰. 인물의 감정선에 음악이 배가 되면 자칫 뻔한 신파가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듯, 과하지 않은 주선율과 악기 구성으로 영화에 어우러짐은 물론이고 그만의 스타일 또한 느낄 수 있다. 이전 작 <트와일라잇>에서도 잘 보여주었듯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8)

음악감독: Alexandre Desplat

추천넘버: "Benjamin and Daisy"


'영화음악의 드뷔시'라는 수식어를 데스플라에게 일말의 여지없이 붙여준 작품. 피아노 선율과 형식 구성이 드뷔시의 달빛이나 아라베스크와 비슷하기도 해서 영화의 잔상과는 별개로 잔잔한 느낌 때문에 더 애착이 갔던 곡이다. 한동안 이 곡에 빠져 무한 반복 재생을 눌러놓고 잠들기도 했었는데, 원고를 쓰며 음악 어플의 곡당 재생 횟수를 확인해보니 내가 이곡을 무려 521번이나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참 어지간히도 좋아했구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8)

음악감독: James Horner

추천넘버: "Rooftop Kiss"


영화음악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말할 수 정도로 훌륭한 음악감독들은 많지만, 인물의 감정선을 풀어내는 데에는 제임스 호너가 단연 1등이라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는 그런 곡. (메인테마 역시 그동안의 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서 느낄 수 없었던 서정성과 신비함을 담고 있다.) 자신이 스파이더맨이라는 것을 그웬에게 선뜻 밝힐 수도, 그렇다고 스파이더맨을 비난하는 그웬의 아버지에게 동의할 수도 없던 피터의 심경과 그런 그를 의아해하는 그웬, 대치한 두 사람의 모습과 옥상에서 바라보는 뉴욕의 야경까지! 그 모든 요소를 고려하며 쓴 곡이라는 게 피아노 선율에서도, 두 사람이 키스하는 순간 변하는 조성에서도 느껴진다.





<모아나>(2008)

음악감독: Mark Mancina, Lin-Manuel Miranda

추천넘버: "You're Welcome"


마크맨시나의 감독 하에 전체적인 넘버들이 구성 됐겠지만 이 곡은 린 민뉴엘 미란다가 작업했다. 사모아 부족의 전통적인 색감을 모티브로 보여주었던 드웨인 존슨의 버전도 영화 속 익살스러운 마우이의 캐릭터를 대변하기에 더없이 좋았지만, 조던 피셔의 감미로운 음색도 어지간히 좋다. 어떻게 R&B로 편곡할 생각을 했을까. 뮤직비디오도 재밌고 심지어 랩까지 잘해? 이사람 도대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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