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다중 우주가 사실이라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은 모든 세계 (이를테면 내가 미국 대통령이라거나, 손가락이 소시지처럼 흐물거리는 세계라거나)가 존재할 것이다. 아무리 낮은 확률일지라도 우주의 수가 무한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 우주와 동일한 우주도 무한히 존재할 것이다.
만일 누군가 다중 우주를 마음대로 점프해 다닐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모든 가능 세계 (논리적 모순이 아닌 모든 경우의 수)를 경험한다는 것은 모든 사물 사태를 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에에올>에서는 그런 우리의 상상을 납득가는 모습으로 그려낸다.
먼저 조부 투파키와 그가 만든 '에브리씽 베이글'이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이다. 조부 투파키는 다중 세계를 넘나드는 무한한 점프 능력을 얻게 된 후로 모든 의미와 도덕관념을 상실하고서 '공'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녀는 일찍이 영원 회귀 사상을 설파한 후 그 스스로 상징계를 탈주해 버린 니체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조부는 단숨에 베이글로 들어가지 않고 단 한가지의 가능성을 실현시키는데 바로 또 다른 조부 투파키, 에블린의 존재이다.
에블린은 온갖 시행착오 끝에 조부 투파키와 같은 능력을 얻게 된다. 그녀는 이제껏 살아오며 그 스스로 피해간 수 많은 다른 가능 세계를 경험하고 나서 마침내 조부를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같이 베이글에 뛰어들기 직전 그녀는 어떤 장면를 보고 다른 결심을 하게 되는데 바로 무능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남편 에이먼드의 친절하고도 '다정한' 모습이다. 에블린은 비로소 그 다정함에 숨어있는 숭고한 가능성을 본 것이다.
철학자 칸트는 자유란 그저 감각 오성에 표상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스스로 세운 법칙을 따르는 것이라 말한다. 그저 느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마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자유가 아닌 그저 반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칸트에게 자유는 의지 속에, 이른바 실천이성에 깃든 것이다. 이 때 의지란 언제나 어떤 법칙을 따르려는 의지이다. 그 법칙이 보편 타당하게 적용 가능하다면 우리는 이를 가리켜 도덕법칙이라 말할 수 있다. 자유는 윤리를 통해 한 개인에서 인류적 차원으로 확장된다.
모든 일에 바쁘고 불만 많은 에블린과 달리 에이먼드는 늘 그가 마주하는 이웃들에 친절을 베푼다. 에블린은 그동안 에이먼드가 답답하고 바보같다고 생각해 왔는데 각성한 그녀는 마침내 그의 모습 속에서 '자유'를 발견한 것이다. 이미 그녀는 모든 사물 사태를 알았지만, 인간의 자유 속에 잠재된 '사건'의 가능성은 그제야 깨닫게 된다. 의미란 물질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 즉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 속에서 창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 조부 투파키와 에블린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두 가지다. 영원한 죽음이라는 존재의 '불가능'의 가능성과, 인간으로서의 자유라는 '의미 사건'의 가능성. 두 감독이 영화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세상이란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거나, 모든 것이 의미로 가득 찼거나 둘 중 하나. '에브리씽 베이글' 앞에서, 우린 어떤 선택을 할까?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이미 한쪽을 택한 게 아닐까?
모처럼 SF의 진수를 담은 영화를 봤다. 오래전 내린 삶에 대한 내 나름의 결론을 멋진 장면으로 그려 주어 두 감독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좀 당황스런 이미지들도 있었지만 완벽한 배우들의 연기에 독특한 연출과 각본이 빛을 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