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규영 Jul 04. 2024

<울분> 필립 로스

2024-06-05

<울분> 필립 로스

-
"과장님, 토할 것 같습니다. 토할 거라고 했잖아요. 제 잘못이 아닙니다. 나와요……"

-

청춘이란 무엇인가? 챗지피티에 물어보면 새벽, 봄, 캔버스, 풋풋한 과일 등 제법 그럴싸한 은유로 대답한다.  모호한 외연만큼 청춘을 뜻하는 이러저러한 표상들이 있을텐데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필립 로스에게는 그것이 (아직) 정화되지 않은 피를 의미한 듯 하다.

정화란 또 무엇인가? 무엇인가를 공동체 내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것으로 가공하거나 솎아내는 작업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생혈은 태어나서 먼저 가족에게서, 그리고 학교와 교회, 군대, 심지어 직장에서 정화 작업을 거쳐 사회인에 적합한 것으로 가공된다. 이 과정에서 탈락한 피는 보이지 않는 공정으로 옮겨진다.

<울분>의 주인공 마키 메스너는 한국전쟁의 공포와 메카시즘의 광풍이 흽쓸던 50년대 미국에서 '청춘'의 삶을 산다. 자식에 대한 불안에 미쳐가는 아버지로부터 탈출해 대학에 들어간 마키는 성공을 위해 강박적일만큼 학업에 몰입한다. 그러나 소위 '채플'로 대표되는 정상적 사교활동에서 벗어난 그는 곧 학생과장의 관심학생이 되고 만다.

마키는 학생과장의 권위 앞에서 저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리기도 하지만 아직 완전히 정화되지 못한 그의 피는 여러 번 발작적으로 솟아오른다. 그의 청춘은 어떤 때는 구토라는 신체적 반응으로, 또 다른 때는 쌍욕으로 분출되는 것이다.

마키는 학교에서 올리비아라는 여성을 만나 교제을 하게 되는데 엄격한 엘리트 집안에서 자란 그녀의 손목에는 사연 많은 상처들이 새겨져 있다. 마키는 올리비아로부터 다른 이와는 다르다는 인정을 받는데 이는 부정한 피가 다른 부정한 피를, 혹은 억압된 욕망의 주체가 다른 주체를 알아본 것이라 볼 수 있다. 올리비아와의 첫 데이트에서 메스너는 그의 억압된 청춘을 다시 한번 분출하게 되는데 이로써 그는 짧게나마 근원적 욕망의 세계를 살게 된다. 아버지보다도 훨씬 강력한 어머니라는 억압이 찾아오기 전까지.

이러저러한 사건의 연속으로, 혹은 분출되고만 울분의 결과로 결국 메스너는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학생의 '신분'을 상실당한 그는 바로 징집되어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그리고 참호에서 그의 부정한 '청춘'을 모두 쏟아버리게 된다. 그 자신이 어린시절 도축장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유대인의 정결 예식과 다름없이.

프로이트에 따르면 억압된 것은 사라지지 않고 반드시 회귀한다. 그게 집착이든 발작이든 쌍욕이든 철학자 김진영 선생의 말대로 우리는 잊어버리지만 우리의 신체는 절대 잊어버리는 법이 없다. 이는 개인 차원에서만 그치지 않고 사회 역사적 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전제정의 끝을 알린 프랑스 혁명이 바로 대표적인 예이다. 비극적 사례로는 나치즘의 광기가 있을테고, 지독한 냉전 가운데 연이어 일어난 유럽의 68혁명과, 미국의 베트남 반전운동, 중국의 문화대혁명 등도 억압된 리비도의 집단적 분출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후로는 세계적 수준의 혁명이 발생하지 않은 걸까? 바야흐로 자유로운 표현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일까? 그런 영향을 무시할 수 없지만 마르쿠제는 현상을 달리 진단한 듯 하다. 그에 따르면 과거의 혁명적 인간들은 오늘날 '대중문화' 아래에서 거짓 욕구를 주입받고, 쇼핑이나 포르노 등 손쉬운 방식으로 그 리비도를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자유는 소비주의의 족쇄에 매인 채 떠도는 값싼 자유로 전락하고 만다.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일 수 있지만 현대의 청년들이 보수화 되는 현상이 이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이제 청춘의 부정한 피는 미디어를 통해 쉬지 않고 가공되고 울분은 예능으로 희석된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체념하고 마는 청춘이란 이미 기성세대의 문법에 포섭되었다는 점에서 겉무늬 청춘이고 만다. 그 스스로 성공이라는 이름의 기성세대가 되길 원한다는 점에서 그는 이제 청춘의 고유한 내포를 상실한 것이다.

내게도 청춘으로 불릴만한 때가 있었던가? 있었던 것도 같은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키와 같지는 못했다. 그 덕에 나는 그와 달리 유령 아닌 존재로서 살아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키의 존재는, 또 마키의 유령은 어느 세계에서 있었던/있는 것인가? 분명한 것은 누군가의 울분을 통해 그의 유령이 반드시 회귀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못다핀 마키 메스너의 청춘을 기리며 나와 시대의 '울분'을 성찰해 본다.
 
#울분 #필립로스

작가의 이전글 <사랑이 한 일> 이승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