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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규영 Oct 01. 2024

<조커: 폴리 아 되> 토드 필립스

2024-10-01

<조커: 폴리 아 되> 토드 필립스


“Knock, knock”

“Who’s there?

“It’s Arthur Fleck”

.


이 년 전 세간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머레이쇼’ 생방송 살인 사건을 포함해 6명 (공식적으론)을 살해한 ‘조커’ 아서 플렉의 재판이 시작된다. 아서의 변호사는 이중 인격 장애를 주장함으로써 죄의 무게를 덜고자 한다. 이를 위해 그녀는 세상에 기쁨을 주기 위해 살던 ‘해피’ 아서 무자비한 살인마 조커 사이에 놓인 틈을 벌리려 한다.


한편, 아서는 그가 수감중인 교도소와 인접한 정신 병동의 노래 교실에서 리 퀸젤을 만난다. 그녀는 아서를 알아보고 그가 조커가 맞는지 묻는다. 조커를 추앙하던 리는 그에게 달콤한 꿈을 노래하고, 아서는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사랑은 해체된 인간 아서 플렉에게 새로운 의미 사건을 일으킨다.


의미란 세계의 틀이자 인간의 조건이다. 태초에 로고스가 먼저 있고 세계가 있었다. 인간은 의미를 떠나 살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니체의 초인 사상은 탈인간 선언이었던 셈이다. 전 편에서 아서의 유일한 의미는 엄마였다. 그래서 그녀가 구축한 세계의 상실은 곧 그의 상상적 자아와 상징적 주체를 동시에 해체하는 사건이었다. 춤을 추며 등장한 ‘조커’는 존재의 구멍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죽음의 공포이자 증상으로서 표출되는 실재의 출현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조커가 사랑을 되찾자 그에게서 인간의 얼굴이 보인다. 그는 다시 환상을 보고 꿈을 꾸는데 상상속 그는 이제 코미디언이 아닌 조커로 등장한다. 인간인 그에게 다시 자아가 생긴 것이다. 조커는 더이상 존재의 구멍이 아닌 하나의 인격이 된다.


재판 과정중에 옛 친구 개리 피들스가 등장 하기도 하는데 그의 울부 짖음은 아서에게 상실한 대타자를 상기시키는 듯 하다. 이제 아서는 사랑하는 동시에 갈등하고, 외로워하고,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의 변론은 실패하고 만다. ‘해피’ 아서와 조커 사이의 간격이 메워지고 벌어지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아서 플렉이라는 단일한 존재자에게 판결이 가능해진 것이다.


조크 혹은 농담이란 상징계에 구멍을 내는 사건이다. 그 틈이 적당할 때 사람들은 실재계에서 비롯하는 찰나의 주이상스를 느낀다. 촘촘한 매트릭스에 숨쉴 틈을 줌으로써 농담과 유머는 상징계를 강화한다. 그런데 만약 그 틈이 지나치게 크다면 경험되어지는 것은 향유가 아닌 '죽음'의 공포이다. 그래서 조커는 불쾌하다. 그가 비추는 실재란 선악의 저편에, 삶의 저편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실재란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세계란 언제나 상징화된 실재이거나 상상화된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상계와 상징계 또한 단단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삶이란 그 사이를 미끄러지듯 흐르는 것이다. 여기서 삶은 사랑이라 봐도 무방하다.


<조커: 폴리 아 되>가 주목하는 것은 '조커'라는 상징화된 존재와 상상된 존재 사이에서 미끄러지는 아서 플랙의 실재이다. 상징은 재판으로, 상상은 그의 환상으로 표상된다. 주목할 것은 그 틈에서 마치 새어나오듯 배설되는 그의 목소리인데 영화는 바로 그 목소리의 처절한 인정 투쟁을 다룬다.

실재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언제나 실패하고 만다.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는 영원히 타자로서 남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언제나 가능하며 무한히 지속된다. 죽음이라는 불가능성에 이를때까지.

#조커폴리아되 #토드필립스


실재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언제나 실패하고 만다.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는 영원히 타자로서 남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언제나 가능하며 무한히 지속된다. 죽음이라는 불가능성에 이를때까지.


#조커폴리아되 #토드필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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