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와 체코의 경계 어느 외딴 산골에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사망자는 ‘왕발’. 이웃인 두셰이코는 사슴들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경찰에 그녀가 보고 믿는 것들을 진술하지만 아무도 ‘늙은 여자’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사망자가 우물에 빠져 죽은채 발견되는데 현장의 주변엔 사슴 발자국이 찍혀 있다. 세 번째 사망자가 올가미에 걸린 채로 발견되자 이제 사건은 연쇄 살인 사건이 되고 마을에는 긴장감이 맴돈다. 네 번째 사망자가 벌레 속에서 발견되자 경찰은 모든 사건의 주변에 있었던 두셰이코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마지막 사망자가 발생하자 사건의 전말이 드러난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자 생태주의적 작가로 알려진 올가 투카르추크의 기묘한 추리소설. <태고의 시간들>에서 처럼 작가는 독자들을 고립된 세계에 몰아넣고 압축된 형태의 시공간을 경험하게 한다. 판타지와 현실 사이에서 펼쳐지는 사건과 삶을 따라가다 보면 그녀의 윤리적 시선과 함께 우리 세계의 가능조건들을 톺아보게 된다.
두셰이코는 별난 사람이다. 사회의 관습이나 의례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고, 언제나 자신의 시선과 신념으로 세상을 본다. 심지어 이름 대신 자신이 만든 별명으로 사람들을 부른다. ‘왕발’, ‘괴짜’, ‘디오니시오스’, ‘기쁜소식’ 등등. 이름이라는 사회적 약속 내지는 소위 텅빈 기표란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녀는 낭만주의 시대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들을 좋아하고, 점성술을 맹신하기도 하는데 세상의 모든 운명이 우주 속에 이미 배치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런가하면 두셰이코는 스스로 말하기를 세상을 ‘성에가 잔뜩 낀 유리창이나 뿌연 거울을 통해 보듯’ 보는 사람이다. 그녀에게 세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모든 문제에는 복합적인 원인이 있고,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단순히 머리로 그렇게 생각할 뿐 아니라 가슴으로 그렇게 느끼며 산다. 개똥지바뀌의 즐거움과, 사슴의 슬픔, 흰 여우의 고통은 그녀의 가슴에서 공명한다. 때문에 세상은 그녀에게 너무나 잔인하다. 그녀의 말을 망상으로 치부하고 비웃는 이들에게 그녀는 외친다. “무지가 얼마나 큰 축복인가!”
하이데거가 말한 바 인류에게 현대란 ‘고향상실’의 시대이다. 사람들은 더이상 자신의 존재의 기원을 묻지 않는다. 도시와 기술으로 발전으로 이제 자연은 인간과 연결된 존재가 아닌 착취해야 할 자원으로만 여겨진다. 공동체는 해체되고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인간이 도래했다. 물신주의자들의 가장 큰 특징이 있다면 바로 두셰이코를 분노케 한 ‘냉담’이다.그들에게 소위 현실은 ‘존재’가 아닌 ‘소유’이므로 ‘세계-내-존재’ 운운하는 이들은 이제 뭣모르는 인간 취급을 당한다.
두세이코는 순전하고, 화가 많고, 현실 감각이 없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모든 이상주의자들의 표상이다. 그녀의 모든 말과 행동이 설득력 있어 보이진 않지만,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세상을 지금껏 바꿔온 건 바로 그녀와 같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다행히 두셰이코에게는 ‘괴짜’나, 보로스, 기쁜소식과 같이 함께 웃고, 노래 부를 수 있는 따뜻한 이웃들이 있었다. 외딴 골짜기에서 서로에게 마지막 고향이 되어주는 이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희망이다.
문학이란 새로운 존재 가능성을 미리 실현해보는 사건의 장이다. 소수자-되기, 동물-되기, 자연-되기 등 경계를 넘나 드는 경험으로 두셰이코의 마을에서 내 세계의 한계지점을 보고 온 듯 하다. 사유의 외연을 넓히는 문학은 언제나 체험적이고 미학적이다. 독특한 분위기, 현상학적 사유, 윤리적 태도, 곳곳에 펼쳐진 상징들은 독자들을 여러 번 멈춰 세운다.
결코 편하게 읽히지 않지만 그러하기에 이 책은 성공한다. 토카르추크는 소설에 낭만적 판타지 대신 개똥지바뀌의 불쾌한 가능성을 담고자 했기 때문이다. 지평을 흔드는 경험이란 불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래서 범인이 누구라고? 두셰이코의 말대로 세상이 거대한 그물과 같다면, 답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