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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규영 Sep 06. 2024

<잘못된 장소 잘못된 시간> 질리언 매캘리스터

2024-09-06

<잘못된 장소 잘못된 시간> 질리언 매캘리스터


“다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죠. ‘난 다 알고 있었어!’ 이렇게요. 하지만 사실 어떤 결과가 나와도 그들은 똑같이 말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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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젠의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도대체 아들 토드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 지 알 수가 없다. 경찰이 조사를 벌이는 사이 잠깐 눈을 붙였다 떳을 뿐인제 집이 너무 고요하다. 핸드폰에 보는데 날짜가 이상하다. 사건 하루 전 날인 것이다.


자고 일어날 때마다 젠은 띄엄띄엄 과거로 이동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토드의 사건을 막으라는 뜻으로 알고 그녀는 주어진 하루하루 동안 단서를 모아간다. 과거를 향해가면서 그녀는 그녀가 미처 몰랐던, 그녀가 알고 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


쌓여가는 이해들을 통해 재구성되는 것은 사건의 전말 뿐만이 아니라 어린 토드의 영특한 재능, 신실한 남편 켈리의 숨겨진 과거,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각지 못했던 모습, 영원할 줄 알았던 우정, 가정보다 일에 매달렸던 자신의 청춘 등 그녀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는 다양한 의미 지평들이다. 이야기가 전개되며 독자들 만큼이나 젠 스스로도 자신과 주변에 대해 이해를 넓혀간다.


그러고보면 어떤 사건에서든 텍스트의 지평 (여기서는 토드 사건의 배경)만큼 중요한 것이 그 텍스트를 바라보는 나의 지평일 것이다. “아무도 엎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졌다면 과연 ‘쿵’ 소리가 났겠는가?” 하는 오래된 철학적 질문이 있다. 공기가 진동 했겠지만 이를 감각하고 소리로서 종합하는 존재자가 없다면 ‘쿵’ 소리가 났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의미 사건은 사건/텍스트의 지평과 해석자의 지평이 공명할 때 발생한다.


그러므로 젠과 같이 이미 일어난 사건을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방법은 딱 두 가지가 있다. 과거로 가서 그 사건의 지평을 재구성하거나, 그 사건을 해석하는 나의 지평을 재구성하거나. 작가는 젠의 해결책으로 전자의 방법을 제시하지만, 타임슬립이 불가능한 우리로서는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후자가 유일한 해결책일 것이다.


나의 지평이란 곧 나의 몸에 체화되고 내가 체득해온 경험에서 비롯하므로, 사건을 변화시키는 열쇠란 다름아닌 기억의 재구성이라 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트라우마를 가진 내담자가 분석가의 도움을 받아 신체와 정신에 각인된 기억을 회상하고, 이를 다른 맥락속에서 재해석 (재배치)함으로써 그의 증상을 극복한다. 분석이란 주체에게 새로운 지평을 부여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는데, 사실 우리가 매일밤 꾸는 꿈이 바로 이와 유사한 기능을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같은 작업은 젠의 과거여행과 상당히 비슷한 점이 있다. 현실로 돌아온 젠이 과거여행의 경험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다만 기시감을 느끼는 걸 보면, 그 모든 여정이란 어쩌면 젠의 트라우마에서 비롯한 꿈 내지는 환상에 대한 알레고리 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과연 현실이란 무엇인가? 현실의 지평 역시도 하나의 구성된 세계이지 않은가? <인셉션>에서 코브가 깨달았듯, 우리의 현실은 결코 구성된 상징계를 벗어나지 못하기에 우리는 언제나 꿈 속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한편, 젠은 이따금씩 이제는 기억에만 남아있는 과거의 풍경들과 반가운 재회를 하기도 한다. 책을 읽으며 나 또한 그녀와 함께 시간여행하는 신비로운 경험을 했다. 가령, 사람들이 오분 십분의 짬에 핸드폰이 아닌 소설 책을 펼쳐 드는 모습이나, 걸음마를 막 땐 아기 토드, 너무 좁았지만 소중했던 신혼집, 젊은 시절 그녀 자신의 아름다운 몸, 그리고 언젠가 처음 만난 사이였던 켈리와의 눈맞춤 같은 장면들.


그러고 보면 모든 만남이란 어떤 장소와 시간 속에서의 만남이겠다. 그게 ‘잘못된 장소, 잘못된 시간’이었을지 ‘바른 장소, 바른 시간’이었을 지 그 순간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옳고 그름이란 언제나 사후적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다만, '나'라는 사건이 자연에게든 사람에게든 트라우마가 어니라, 간직할 만한 추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내 글 또한 그러길 바란다.


#잘못된장소잘못된시간 #질리언매캘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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