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라고 자신의 묘비명울 써달라고 보르헤스는 유언했다." 책의 첫 문장이다. 뒤이어 나오는 문장들을 보면 칼은 곧 세계와 보르헤스/작가/주인공 사이에 놓인 심연의 간극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책에는 두 주인공이 등장한다. 말을 잃어버린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 남자는 고대 희랍어를 가르치고, 여자는 수강생이다.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 놓이지만 책이 전개되는 동안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다. 불완전한 감각이 간극을 만들었겠지만, 바로 그 간극이 마지막에 이르러 극적인 장면을 만들어 낸다.
책에서는 두 가지 형식이 교차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전지적 시점으로 여자의 세계를 서술하는 하나의 형식이 있고, 남자의 목소리로 등장 인물들에게 말하듯 서술하는 서간체 형식이 있다. 이 책에서 여자는 목소리가 없다. 그녀가 중심인 장에서도 화자는 사태를 서술할 뿐 그녀의 생각을드러내지 않는다. 발화되지 않은 채 삼키고 마는 몇 번의 마음의 소리를 제외하면 그녀는 목소리와 얼굴없는 대상으로서 나타난다.
책에는 여자의 꿈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꿈이란 무엇인가? 이미지의 무의식적 연쇄와, 의식의 연결 과정이라 할 수 있겠다. 꿈을 꿀 때 우리는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을 다른 기억들과 연관짓는다. 코드화된 이미지-서사는 장기 기억으로 남는다. 여기서 주목할것은 이미지들이 먼저 있고 서사/해석이 뒷따라 붙는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꿈에서 개별 이미지와 의미 사이의 관계는 임의적인 것이다. 하지만 임의성의 자각, 즉 현자타임은 꿈을 깨야만 도래한다. 모든 꿈은 꿈 속에서는 현실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도 이와 같다. 기표란 상징화된 이미지라 할 수 있는데, 꿈에서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하나의 서사로 꿰어지듯, 개별 기표들은 언어라는 거대한 상징계로 꿰어진다. 언어 사용자에게 모국어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고대 희랍어와 같이 낯선 언어를 배우는 일은 새로운 세계를 배우는 것과 같다. 특히 번역이 불가능한 새로운 문법을 접하면 우리는 꿈에서 깰 때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그렇다면 모국어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이 보는 세계란 어떤 것일까? 상상해 보건대 그 세계란 하나로 꿰어지지 않은 이미지의 연쇄이자 감각 그 자체일 것이다. 그에게 이미지란 기표화 되지 않은 것이다. 전체로서의 ‘숲’이나 ‘나무’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개별적이고 전적으로 이질적인 존재자들, 푸르스름하고 곧은 이미지와 단단하고 울퉁불퉁한 감촉들만 가득한 것이다. 총체성이 없기에 개별성이란 것도 없고, 전체성이 없기에 다원성이란 말도 성립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차이’이며 ‘차이’만이 반복된다. 세계란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것이다. 실어증의 최종 단계는 인지능력의 상실이다.
그런 점에서 책의 형식은 주체가 희미해져 버린 여자, 인간 세계의 질서와 문제를 겪고 있는 여자 앞에 놓인 칼을 일관되게 주목하고 있다. 그렇다면 책이 남자의 목소리를 통해 주목하고 있는 칼은 무엇인가? 바로 현상과 실재 사이에 놓인 심연의 칼이다. 남자는 목소리가 있는 주체이다. 고도로 복잡한 희랍어를 전공한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상징계가 아닌 실재계이다. 그는 섬세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지만, 보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불안은 플라톤을 공부하던 옛날부터 하루하루 시선을 잃어가는 지금까지 그를 괴롭힌다.
인간은 실재를 바로 보지 못한다. 세계란 언제나 구성된 현실일 뿐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전달되고 진동된 물리 화학적 에너지일 뿐이다. 본다 할지라도 보이는 것은 물체의 앞면일 뿐이다. 앞과 뒤를 동시에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경험 세계를 실재와 동일시하며 살아간다. 부분으로 전체를 갈음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플라톤과 칸트와 이 책의 남자와 같은 자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 있어 주체와 물자체, 현상과 실재 사이에 놓인 골짜기는 깊고 아득하기 때문이다. 삶은 죽음을 갈음하지 못한다.
<희랍어 시간>에서 남자와 여자의 세계는, 눈커풀과 입술은, 밖에서 닫히고, 안에서 걸어잠긴다. 그들에게 세계는 도무지 간단치가 않다. 몇마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렇고,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 그렇다. 작가와 나의 세계가 그러한 것처럼.
문제가 심화되는 듯 하다가 이윽고 두 사람이 만나게 되는 순간이 온다. 각자의 세계가 위태로운 순간, 대상과 주체, 즉자와 대자, 실재계와 상징계가 만나 서로의 존재를 열어밝힌다. 그 사건의 순간, 접촉이 있었다. 심연의 간격을 뛰어넘는 최초의 언어가 있었다. 세계라는 매개 없이 나와 타자 사이에 놓인 단 하나의 막으로 나누는 대화가 있었다. 모든 것이 단번에 열리는 시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