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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녘 Jul 25. 2019

먹기 위해서라도 살아야겠다.

대학교를 다닐 때 어느 수업시간이었다. 교수님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좋아하는지 물었던 적 있었다. 하필 주목받는 것을 극도로 부담스러워하는 나에게 교수님의 시선이 꽂혔고, 나는 ' 먹는 거요 '라는 단순한 대답을 주저 없이 뱉었다. 옛날이야 먹고살기 힘들어서 ' 먹는 것 '이 허기를 채우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에 불과했겠지만, 요즘은 달라졌다. 어딜 가나 사람들이 집요하게 맛집을 찾고 그전에는 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음식이 빠르게 유행을 하기도 한다. 나 역시 낯선 곳에 가게 되면 그곳의 맛집부터 검색을 하고, 유행하는 음식이 있으면 왠지 꼭 먹어봐야 한다. 몇 개월 전부터 마라와 중국 당면이 난리이길래 나만 지나칠 수 없지 싶어 후다닥 주문한 경험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른 유행하는 것들에는 관심도 없고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물욕도 딱히 없는 내가 먹는 것에 있어서는 항상 눈과 귀가 열려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식가의 기질이 있고 그런 것은 아니다. 나는 그냥 맛있는 게 맛있는 거고 좋은 게 좋은 단순한 사람이다.

어쩌면 ' 먹는 것 '에 대한 나의 사랑은 갑자기 생긴 건 아닌지도 모른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내가 중학생 때, 심심할 때마다 꺼내 읽던 책은 세계 여러 나라를 소개한 책이었다. 중국, 일본, 독일, 프랑스 등 각각의 나라가 한 권당 실려있고, 한 권씩 해치울 때마다 나는 세계일주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책 안에 실린 여러 나라의 사진들과 그 나라만의 전통 이야기, 기후나 전통문화, 음식들을 보며 언젠간 꼭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버킷리스트를 적어보았는데 적다 보니 죄다 먹는 것에 대한 것뿐이었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 맥주와 슈바인학센 먹어보기,  영국에서 피시 앤 칩스 먹어보기와 같은 것들. 거의 먹는 것뿐이어서 차라리 먹킷 리스트라고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심지어 지금 저 음식들을 보니 ' 한국에 가서 김치찌개 먹어보기 '같은 느낌이 들어 웃기기도 하다. 어쨌든 나는 어릴 때부터 다른 것들보다도 특히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컸던 것이 분명하다.

가끔 맛있게 먹었던 음식들을 떠올리다 보면 ' 살고 싶다 '는 생각이 절절히 들면서 마음에 생기가 도는 듯하다. 다시 그 맛을 느끼기 위해서라도 나는 꼭 살아야겠다 뭐 이런 생각. 대개 조금 지쳐있거나 우울할 때 그런 생각이 들긴 하지만 어쨌거나 맛있는 음식이 나를 살고 싶게 만든다니 나에게 ' 먹는 것 ' 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음식에는 어떤 기억도 같이 담겨있어서 더 의미가 깊다. 아무리 좋았던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고 왜곡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찰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사진이나 영상을 찍어 남겨두기도 하는데, 음식도 어느 정도 그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향신료 냄새가 풀풀 날리던 캄보디아의 현지 음식. 그 낯선 냄새를 맡을 때마다 아마 널브러져 있는 비쩍 마른 하얀 소가 잠시나마 다시 생생하게 떠오를 것이다. 여전히 고기국수를 보면 제주도에서 어느 늦은 저녁, 버스 막차가 떠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오래 기다려서 먹고 나와 맛있어서 다행이라며 배 두드리던 기억이 따라오는 것처럼. 그때 먹은 음식과 그날의 일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기록하고 싶어 졌다.

그저 맛있게 먹는 것만 좋아하는 줄만 알았지, 음식을 만드는 것에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을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같은 메뉴라도 다양한 레시피를 찾아보고, 칼로 총총 썰고, 마트에 가서 식재료들을 구경하는 것이 이렇게나 재미있는 일인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22살에 학교 다니는 것이 버거워서 휴학을 했다. 얼마나 버거웠느냐면 내가 휴학을 하지 않더라도 학교에 잘 나가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도망친 곳에 낙원 없다는 말이 맞았다. 그전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긴 했지만, 앞으로 뭘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짙어졌고 꽤 오래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는 동안 ' 아메리칸 셰프 '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아무런 의욕도 없이 그저 껍데기 같던 내가 오랜만에 마음이 꿈틀거렸다. 화면을 가득 채운 다양한 재료들의 색감부터 역동적인 음악에 맞춰 마치 연주를 하는 듯한 자신 있는 칼질, 불판 위에서 노릇노릇 구워지는 계란과 베이컨, 그리고 완성된 음식들. 항상 내 앞에 놓인 먹음직스러운 음식에만 감탄할 줄 알았는데, 음식을 요리하는 그 과정 자체가 이미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나도 조금씩 만들어 보기 시작했다. 전문적인 기술이나 요리에 대한 지식은 전무하지만, 자주  만들어 보다 보니 새로운 시도를 하더라도 최소한 겁은 나지 않았다. 어쨌든 내 입에만 맛있으면 되니 상관없다는 배짱도 생겼다. 다행히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음식들은 대체로 맛이 괜찮았고, 가족들도 좋아해 주었다. 그러면 나는 요리를 제대로 배운 적은 없더라도 괜히 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어깨가 으쓱해졌다.

특히 우울한 날. 그냥 거를 수도 있는 한 끼에 아주 조금 더 신경을 쓰는, 오로지 나를 위해 정성을 쏟을 줄 아는 사람이고 싶다. 그동안은 맛있는 음식 자체가 나를 달래주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실 그 음식을 ' 만드는 ' 과정 속에서 나는 더 많이 회복된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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