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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녘 Aug 30. 2019

어떤 날

19.08.29 - 날씨

 오늘은 책상 정리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읽어야지 하고 꺼내놓은 책들과 공부해야지 하고 쌓아놓은 토익과 중국어 책. 큰 결심에 충동적으로 사버리고 아직도 너무 깨끗한 다이어리. 무엇이든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동안 펼쳐놓았던 것을 정리해야 한다. 그동안 어수선한 건 내 마음뿐 만이 아니었다. 이젠 책상이든 뭐든 정리를 좀 할 필요가 있었다.  

 입추를 기점으로 날씨가 많이 선선해졌다. 낮엔 습하지도 않고 저녁에는 딱 걷기 좋을 만큼 시원해졌다. 드디어 이렇게 얇은 긴팔을 입었을 때 덥지 않은 날씨가 되었다. 더위가 꺾인 이맘때 저녁은 조금 위험하다.  살결을 스치는 가벼운 밤바람은 당장이라도 새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설렘을 가져왔다. 잔뜩 취했을 때에나 꺼낼 것 같은 마음 깊숙이 심어둔 진심이 아무렇지 않게 나오기도 한다. 쾌적한 밤공기에 나는 웃음이 헤퍼지고 세상 모든 것들이 아름다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다가 도망치듯 가버린 폭염과 갑자기 찾아온 선선함에 괜히 섭섭하기까지 한다. 쓰레기 같은 옛 연인도 떠나면 눈물이 나지 않던가. 힘들었던 무더위도 막상 하룻밤 새 가고 없으니 그렇게 홀연히 사라질 수 있나하고 잠시나마 서운한걸까.

 며칠 전, 잠깐 산책하자는 친구와 만나 저녁에 11km를 걸었다. 그날 내가 얼마 동안 공복 상태였는지, 얼마나 피곤했는지는 상관없었다. 강변에 얼마나 많은 벌레가 나에게 달라붙는지도 중요치 않았다. 어딘가에 홀린 듯 우리는 계속 걸었다. 그냥 걷고 또 걷고 걸었다. 거의 두 달 만에 만난 우리는  맥락 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다 기억나진 않지만 그날 그렇게 걷고도 더 걷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던 기억은 난다. 아마 다음날 내가 일을 가지 않았다면 우리는 근처에 있는 대학 캠퍼스를 실컷 돌다가 다시 집까지 걸어갔을 것이다. 선선한 밤공기의 기운으로. 비교적 짧은 가을의 밤 산책은 그 설렘을 아는 사람들만이 누리는 특권 같은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못 봤던 친구들을 만나고 할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내며, 열심히 돈도 벌면서 8월을 그렇게 보냈다. 그러면서 훗날 그리워할 순간들이 또 잔뜩 쌓여버렸다. 어수선했던 8월은 이제 정리해서 넣어두고 무심하게 바뀐 계절처럼 무던하게 9월을 꺼낼 준비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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