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꽃물과 밤
노엘 휴가를 보내고 돌아온 생또방. 새벽 4시. 주방문을 열자 향긋한 향이 가득이다. 연중 이맘때쯤이면 둥근 고리모양의 브리오쉬 꾸혼 couronne(왕관이라는 뜻)을 굽는 주방에는 오렌지 꽃물 (eau fleur d'oranger) 향이 넘실댄다. 이 꾸혼에 오렌지 꽃물이 많이 첨가되기 때문이다. 오렌지 꽃이 주재료지만 오렌지 향과는 많이 다른 이 향. 글로는 설명할 길이 없는 그 달짝지근한 향을 공유할 수가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오렌지 꽃을 증류해서 만든 오렌지 꽃물이 바로 생또방의 꾸혼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재료다. 이 향 덕분에 오랜만에 주방에 복귀했다는 긴장감은 내려놓은 채 향에 취해 산뜻하게 하루 일과를 시작할 수 있다.
부쉬드 노엘이 크리스마스 식사 자리에만 나오는 디저트라 크리스마스 전에 미리 주문을 받아 당일에만 판매하는 식이라면 꾸혼과 갈레트는 1월 내내 심지어 2월까지도 사람들이 찾는 상품이다. 갈렛트 속 도자기 인형 fève를 모으기 위해서 매일매일 사 먹는 사람도 있다지만 단순히 맛있어서 혹은 이맘때 아니면 먹기 힘든 음식이라 사 먹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왠지 우리나라에서 이맘 때면 길거리에서 따끈따끈한 붕어빵을 사 먹어야 제대로 겨울을 난 것과 같은 이치랄까?
부쉬드 노엘이 파티시에만의 일이었다면 갈레트는 파티시에와 tourier 투리에(밀가루 반죽을 주로 담당하는 직책), 그리고 꾸혼은 블랑제, 즉 제빵사들의 일이다. 제빵사들이 그 전날 오후에 꾸혼 반죽을 성형해 얼려두면 그다음 날 아침에 발효해서 구워내는 식으로 일을 나눠서 진행하고 있다. 브리오쉬를 굽는 데 제과 쪽에서 사용하는 오븐이 더 적합해서 그렇다.
한 가지 더! 내가 가장 즐겨하는 꾸혼 마무리 작업. 가운데 플랑지판 아몬드 크림을 넣고 구워내는 갈레트는 미리 도자기 인형을 넣고 구워내는 반면 꾸혼은 구운 다음에 도자기 인형을 넣는다. 꾸혼을 뒤집어 칼집을 내고 도자기 인형을 깊숙이 넣는 작업이 나는 왠지 즐겁다. 기분이 좋으면 몰래 두 개를 넣기도 하는 건 비밀. 물론 빠뜨리고 한 개도 안 넣는 실수는 저질러선 안된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 도자기 인형에 꽤나 진지하니까 말이다. 이 꾸혼에는 3가지 맛이 있다. 오렌지 꽃물만 첨가한 nature, 멜론 설탕 절임을 넣은 rimoux맛, 그리고 올해는 밤쨈과 밤 절임인 마롱글라세를 넣은 밤 맛을 새로 출시했다. 프랑스에 와서 밤이 주재료인 몽블랑을 한 번도 못 먹어 봤다는 나의 말에 (스위스 국경지역에서 주로 많이 먹는 터라 스페인과 접하고 있는 툴루즈에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사장님이 큰 맘먹고 밤맛을 개발했다는데, 내년에는 팥맛이 그립다고 한 번 말해볼까 싶다. 덕분에 값비싼 마롱글라세도 주섬주섬 열심히 맛보고 있는 중이다.
요새 이 갈레트 가격이 화재다. 우리 매장도 지역 뉴스에 나올 정도로 갈레트 민심이 들끓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원자재값이 상승하고 더구나 전기세가 엄청 비싸져서 작년에 비해 가격이 많이 올랐다고 한다. 8인용 갈렛트가 26,50유로, 꾸혼 8인분이 14,80유로. 예년보다 20% 정도 높아졌다. 이 덕분인지 우리 매장은 갈레트 판매 수익만 매일 4천 유로를 달성하고 있다고 한다. 2유로도 채 되지 않는 바게트 가격은 10 성팀만 더 올려도 정치인들을 비롯해 반대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이보다 훨씬 비싼 갈레트 가격은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크게 동요하지는 않는 것 같다.
갈레트 시즌이 지나면 크레페 시즌이 오고 그리고 부활절이 다가온다. 그러고 보면 어느새 5개월도 남지 않은 자격시험. 오늘 아침부터 다시 한 달만에야 학교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동안 일해서 피곤하다는 핑계로 공부를 하나도 안 했더니 학교 가는 게 솔직히 부담이다. 시험준비는 잘하고 있냐는 선생님들의 압박과 눈치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아아아, 이번주도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