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제과월드컵에 가다
처음 방문해 본 리옹은 프랄린 Praline (볶은 아몬드를 붉은 설탕에 졸인 것) 색처럼 강렬했다. 온 도시가 분홍빛으로 물드는 툴루즈에서 왔음에도 리옹 곳곳의 제과점 진열대를 붉게 물들인 이 프랄린의 존재감은 신기할 정도였다. 이 성냥 머리처럼 생긴 프랄린은 그냥 사탕처럼 먹기도 하고 타르트의 주재료로 쓰이기도 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부드러운 빵 속살에 알알이 박힌 브리오쉬 프랄린이 아닐까 싶다. 툴루즈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재료라 리옹에 머무는 2박 3일 동안 1일 1 프랄린 했다.
갈레트로 바쁘고 바쁜 1월에 갑자기 왠 리옹?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꽤 오래전부터 계획된 일정이었다. 바로 Sirha (Salon International de la Restauration, de l'Hôtellerie et de l'Alimentation) 박람회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Sirha는 리옹에서 2년마다 한 번 개최되는 세계적인 규모의 식품박람회로 여러 요리 경영대회도 함께 진행된다. 그중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은 바로 세계제과월드컵 (Coupe du Monde de la Pâtisserie). 축구도 아닌 제과 월드컵이라니?! 전 세계 빵쟁이들의 축제에 내가 빠질 수가 없지!
박람회 규모는 압도적이었다. 몇 시간을 돌아도 끝이 안 보이는 넓은 공간에 한껏 멋지게 만든 쇼케이스에는 먹을거리 볼거리가 넘쳐났다. 다른 박람회처럼 여러 가지 제품도 직접 구매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참여 업체에서는 본인들의 제품을 알리고 미래 소비자들에게 매력을 어필하는 게 더 중요한 자리였던 것 같다. 덕분에 아무 부담 없이 열심히 맛보고 카탈로그도 잔뜩 얻었다. 학교나 업장에서 매일매일 쓰는 상품들을 곳곳에서 발견하고서는 '어, 이 과일 퓌레 내가 매일 쓰는 건데?!' 하고 기쁘기도 했고, 새로 나온 최신형 오븐을 보고서 '우리 사장님한테 꼭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사진도 많이 찍었다. 새로운 트렌드도 접할 수 있었는데, Vegan과 친환경 포장지가 단연 기억에 남는다. 각 나라 부스를 둘러보는 것도 재미있었는데, 한국의 부스는 찾아볼 수 없어서 참 아쉬웠다. 그에 비해 일본 부스는 딱 좋은 자리에서 주류와 카레 시식을 하고 있었다. 한식도 꽤 잘 나가는 요즘인데 이런 박람회에 나오면 좋았을 걸...
든든히 배도 채웠겠다, 드디어 세계제과월드컵 입성! 올해 대회 주제는 '지속가능한 환경'이다. 각 대륙 예선을 통과한 20개 나라 대표팀이 출전하는데 각 대표팀은 4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표팀의 주장은 심사위원이기도 하다. 나머지 3명은 이틀에 걸쳐 10시간 동안 4가지 케이크와 3가지 조각품을 만들어야 한다. 모든 출전팀이 10시간 동안 동시에 만드느냐? 그건 아니고 시식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각 대표팀의 각 품목마다 시작 시간이 다르다. 종료 시간 임박해서는 카운트다운도 하고 종소리도 울리고 마치 요리왕 비룡 대회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대회장은 그야말로 축제의 장이었다. 제과사들은 진땀 나는 시간이겠지만 대표팀을 응원하는 관객들의 환호성과 강한 비트의 음악, 현란한 조명과 화면에 비치는 심사위원들의 기대에 찬 표정들로 나도 절로 흥겨웠다. 제한시간이 끝이 나면 멋지게 차려입은 폴보퀴즈 학생들이 각 심사위원에게 케이크를 서빙하는데 일렬로 서서 절도 있게 서빙하는 것도 꽤나 즐거운 볼거리였다. 심사위원들은 참신하고 예쁜 케이크를 하나라도 놓칠까 열심히 사진을 찍어대는데, 저 사람들 참 인스타 열심히 하겠구나 생각이 절로 들었다. 관객들은 그럼 어떻게 하느냐? 중계석 진행자들이 맛을 보고 관객들을 위해 설명해 주는 것을 들으며 맛을 상상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심사위원들과 동시에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곳까지 온 보람이 있었다.
프랑스팀의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예뻤던 케이크들.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었을까, 신기하고 놀라웠다.
그리고 드디어 한국팀! 한국은 꿀벌을 주제로 한 다양한 제품들을 선보였는데, 팀원들끼리 주제에 대해 얼마나 토론하고 아이디어를 짜냈을지 그 고뇌의 시간들이 고스란히 보이는 듯했다. 비록 5위에 그쳤지만 결과물을 전시한 부스에서 1등 팀 다음으로 관람객들에게 인기 있는 곳이었다.
미리 결과를 말하자면 올해 1위는 일본에게 돌아갔다. 만년 2등 팀이었던 일본에게는 근 30년 만의 1위 탈환이었다. 포경을 많이 하는 나라에서 고래를 주제로 선택했다는 게 조금 아이러니였지만 그 결과물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고래는 말레이시아나 다른 나라에서도 많이 활용한 소재였는데, 일본의 작품이 가장 눈에 띄었다. 이런 대회에서는 설득력 있게 소재를 잘 선택하는 것도 그리고 차별화를 두고 표현하는 게 차 중요한 것 같다.
피날레. 정말 국가 행사처럼 국기를 흔들며 입장하고 우승팀의 국가도 울렸다. 심사위원 피에르 헤르메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제과사는 정말이지 멋지고, 아름다운 직업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여러분?' 매일 작고 시끄러운 새벽의 주방에서 다쳐가며 일을 배우는 어프헝티들에게는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누구나 피에르 헤르메처럼 유명해질 수도, 국가대표가 되어 이렇게 환호성을 받는 자리에 설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자부심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직업이라 생각한다.
추가로 세계제과월드컵이 끝난 다음날 실시된 폴보퀴즈 요리대회. 올해의 주제는 Feed the kids였다. 어린이 메뉴로 어린이 심사위원도 참여했다. 요리도 예술이 될 수 있구나, 하고 눈과 코가 호강한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