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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수경 Dec 27. 2020

철학으로 다시 보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

넷플릭스 '소셜 딜레마'와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는 실리콘밸리 SNS 개발 주역들의 인터뷰로 시작한다. 그들은 모두 소셜미디어의 놀라움에 대해 이야기하다, 이내 그것들이 우리를 얼마나 망쳐놓았는지에 대해 실토한다. 유튜브, 트위터, 인스타그램를 만든 이들이 입을 모아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모두 같다. 바로 우리가 동전의 앞면에 너무 혹했다는 것.



출처: 구글. 포스터가 마치 자기 전 내 모습 같다


소셜 미디어는 10대들을 남과 비교하게 해 우울하게 만들고, 필터를 씌운 사진과 닮고 싶게 만든다. 다큐멘터리에서는 통계적 근거가 뒷받침되었지만, 다른 사람이 올린 보정 가득한 사진을 보고 본인의 외모를 비관하는 경우는 필자의 주변에도 드물지 않게 보인다. 하물며 눈 앞에 보이는 것을 더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10대들은 어떨까. 주변만 둘러봐도 사람을 단편적으로 판단하고, 타인과 스스로를 비교하게 하는 데에는 SNS의 영향이 크다.
 




“상품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당신이 상품이다.”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는 우리가 소셜 미디어를 무료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짚어준다. 트위터, 유튜브, 인스타그램은 사용자들의 관심을 놓고 경쟁하고, 최대한 시간을 많이 쏟게 설계되어 있어, 우리의 관심이 상품이 된다. 그들이 보여주는 피드와 알고리즘은 개인의 행동과 사고방식, 정체성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점진적으로 우리의 내면에 파고든다. 이 과정에서 소셜 미디어는 광고를 통해 막대한 수익을 얻는다.
 
전문가들은 이 현상을 감시 자본주의라 일컫는다. 우리의 모든 온라인 활동이 감시, 추적되는데, SNS는 우리가 어떤 이미지를 오래 봤는지도 기억한다. 왜 내가 관심을 가질 법한 광고만 뜨는지 궁금해한 적이 없는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중심에 기만이 있기 때문이다.
 


출처: 구글


유튜브가 활성화되고 나서 지나치게 자극적인 영상으로 조회수를 얻으려는 유튜버들이 많아졌는데, 그들은 마치 욕을 먹더라도 조회수만 높으면 그만인 것처럼 보인다.

다큐에서는 SNS 이용자들이 사회적 인정의 개념으로 5분마다 좋아요를 보상받는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여기서 악순환이 생긴다. 다음엔 뭘 해야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 평판에 집착적으로 굴게 되기 때문이다. 팔로워가 많은 ‘인플루언서’가 아니더라도, 여행을 떠나서 좋아요를 많이 받을 사진을 찍느라 순간을 즐기지 못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 같다.
 


게다가 불안하고 외로울 때면 소셜 미디어 피드를 의미없이 넘겨보고, 남들과 온라인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에 집착하게 하는 이 반복은 결국 우리가 본래 가진 능력을 약화시키는 데까지 이른다. 그럼에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두가 모두를 볼 수 있고, 또 스스로를 전시하는 세상으로 뛰어든다.
 


소셜 미디어의 작동 행태는 '판옵티콘' 과 다름 없어 보인다. 미셸 푸코가 저술한 책 '감시와 처벌’에 따르면, 원형감옥, 일망 감시 시설로 일컬어지는 판옵티콘은 여러 개의 독방들로 나뉜 원형의 건물 중심에 감시탑이 있는 형태다. 판옵티콘은 감시자가 보이지 않지만 감시의 대상은 보이는 구조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죄수가 언제나 정확하게 파악될 수 있다. 하지만 죄수 그들이 스스로 밖을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정보의 대상이 되지만 소통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



출처: 위키피디아. 중간의 탑에서 모든 방을 바라볼 수 있다

 
판옵티콘이 가져오는 효과는 신체의 통제를 넘어 정신에게도 닿는데, 죄수가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지각하면, 이 의식을 내면화해서 실제로는 아무도 스스로를 보고 있지 않더라도 자발적으로 규율을 지키기 때문이다. 감시자가 눈을 떼더라도, 즉 감시 작용이 중단되더라도 그 효과는 지속될 수 있기 때문에 권력은 자동적으로 기능하게 된다.
 
'감시와 처벌'의 저자인 푸코는 이 비가시적인 권력이 개인을 통제하고 감시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을 지적한다. 시선은 개인을 구조적으로 강압할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생명의 내면에 자리잡아 개인이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든다.


책에서 주로 말하는 권력은 정치적 권력에 가까운데, 푸코 역시 예전에는 중앙집권적인 감시가 권력으로 작동했다면 이제는 그 권력이 대중에게 분산되었다는 것을 언급한다.


다큐멘터리와 책을 종합해봤을 때, 이 권력은 이제 소셜 미디어에게로 넘어간 듯하다. 개인으로 하여금 모두가 자신을 볼 수 있게하고, 자신이 보여진다는 것을 인지하며 동시에 예측당하도록 내버려두게 할 수 있는 기제가 소셜 미디어 외에 또 있을까?


소셜 미디어를 하지 않는 순간에도 정체성이 자주 하는 커뮤니티에 맞춰지고, SNS에 올릴만한 사진/영상을 찍으려 애쓰는 사람이라면 이미 소셜 미디어에 예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신체가 정신의 감옥이라고 했지만, 푸코는 반대로 정신이 신체의 내부에서 권력의 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권력이 담론을 통해 일상적 관계에서 다른 것을 말할 수 없게 하는 것임을 고려했을 때 이 사회에서 나의 정신을 형성하는 것은 무엇일까.


보여지고 기록되고 있다는 사실, 그것을 인지하는 것은 타자성의 멍에를 지게 한다. 끝없는 타인의 관찰, 그리고 자기 검열로 인해 우리는 이미 일정 부분 주체성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를 비롯한 현대인들이 정신을 형성하는 권력을 스스로 내놓고 있지는 않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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