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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수경 Jan 14. 2021

나의 빛을 나에게 헌납합니다

소설책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리뷰


3년 전쯤 읽었던 박민규 작가의 장편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이런 문구를 찍어두었던 것은 기억나는데 어째 줄거리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지.

새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주인공들이 줄곧 들었던 비틀즈의 ‘strawberry fields Forever’ 을 들으며,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 다시 한 번 빠져들었다.


이 글도 이 노래를 들으며 읽으면 좋을 듯



잘생긴 배우 남편의 무명 생활을 평생 뒷바라지하고도 내쳐진, 못생긴 어머니를 둔 주인공 ‘나’. '나'는 백화점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누가 봐도 '헉’ 소리가 나올 정도로 못생긴 ‘그녀’를 만난다.

늘 고개를 숙이고 다니며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녀’는 사실 클래식과 문학에 조예가 깊지만, 아무도 그녀를 진지하게 대해주지 않고 단지 조롱의 대상으로만 삼는다.


하지만 '나'는 똑같은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추녀'라는 타이틀에 갇혀 사는 그녀의 아름다운 내면을 알게되고, 곧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본인과 다니는 게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일일까봐 끝없이 주눅 들고 움츠러든다. '나'는 그런 '그녀'를 진심으로 대하며 사랑으로 감싸 안지만, '그녀'는 긴 편지만을 보내고 '나'의 곁을 떠난다.

(이 뒤는 직접 책으로 확인하는 게 좋을 듯함)


소설의 배경은 1980년대. ‘못생긴 여자를 강간하려면 얼굴을 덮어 씌우면 된다’는 말이 흔한 농담으로 통용되던 때인만큼, 타인의 외모, 특히나 ‘사무실의 꽃’ 정도로 여겨졌던 여자의 외모에는 모두 가차없이 굴었던 현실이 잘 묘사되어 있다.


못생긴 여자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묘사는 '그녀'가 '나'를 떠난 뒤 보낸 편지에서 잘 나타나 있다.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고 어떤 노력도   없었어요. 게으름을 부린 것도, 특별한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 세상엔 장애을 지니고 태어나는 사람도 많단다, 라고 말하며 사람들은 저의 어둠을 장애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수히 저를 장애인으로 만들어왔습니다... 저는 분명 세상이 만들어낸 장애인입니다..
저의 얼굴을 학대한 것은 세상만이 아니었습니다. 돌아보면 저는 스스로도 스스로를 학대해 온 것입니다.
저 같은 여자들은 결국 스스로를 마취해야 합니다. 특이한 여자, 웃기는 여자...설령 여자의 일부를 포기한다 해도 못생긴 여자보다는 낫다,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야근을 마치고 미쓰 리 이렇게 늦었는데 괜찮겠어? 건성으로 묻는 말에 그럼요, 전 얼굴이 무기잖아요! 대답이라도 해야 환영받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
얼굴이 무기인 그녀들에게도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을...막춤을 추는 그녀들에게도 영원한 사랑의 발라드가 있다는 사실을 세상은 결코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인간은 아름다운 얼굴을 사랑합니다. 신께선 모두를 사랑하신다 하지만, 그 말을 전하는 인간은 결코 모두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작가가 이 그림의 하이라이트 된 못생긴 시녀를 보고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책을 완독하고 나니 주인공이 만났던 인물들 중 ‘군만두’라는 여자아이가 마음에 남는다. 누가 봐도 예쁜, 스스로도 그 사실을 자각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여자 아이. '군만두'는 백화점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외모를 이용해 언제나 편하게 생활하면서도 남자들은 물론 여자들의 호감까지 단숨에 끌어 모은다.

(예쁜 여자를 정말 좋아하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점을 남자 작가가 간파했다는 게 놀랍다. 흔한 오해와 달리, 여자들은 예쁜 여자들을 질투하기보다 동경한다.)


결코 나쁜 성격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미녀들이 그렇듯- 자신의 미모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너무나 쉽고, 빠르게 파악하는 아이였다. 이를테면 짐을 나르다가도 아, 힘들어 하는 표정으로 갑자기 쪼그린 채 울상을 짓는 것이다. 그러면 다투어 주변의 남자애들이 짐을 들어주는 것이다.
결코 낯설지 않은 구도라도 나는 생각했다. 남자들의 세계와 비슷하구나, 힘이 센 놈을 중심으로 질서가 편성되는 남자아이들의 세계를 나는 떠올렸었다. 우열을 가리고 굴복하는...


외모로 얻을 수 있는 호의를 권력처럼 사용하고 다니던 여자 아이는 백화점에 온 미녀 연예인을 에스코트하게 되는데, 그 때 주인공 ‘나’는 여자 연예인 옆에 선 여자아이를 보고 ‘군만두’라는 호칭을 떠올린다. 늘 자신만만하던 아이가 하나의 요리가 아닌 짜장면을 시키면 덤으로 주는 군만두처럼 여자 연예인 옆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만두는 예쁜 연예인 옆에서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내가 이 여자보다 못생겼구나, 부끄럽고 부럽다, 하는 마음의 빛이 얼굴에서 보인 순간, '나'는 아이를 군만두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보면 뜨악한 별명이기도 하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외모로 순위를 매겨 잘난 체 하는 여자를 비아냥거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빛을 자발적으로 헌납해 외모라는 무기를 가진 아이의 손에 쥐어주는 주변 사람들과 사회를 비꼬기 위한 것 같다. 끊임없이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하고, 내가 누구보다 낫다는 우위를 매기는 사람들에 늘 의문을 품던 '나'의 시각에서는 어차피 모두가 다 불시에 덤으로 주는 군만두가 될 사람들이었을거다.


조금만 이뻐도 와와, 조금만 돈이 있다 싶어도 와와, 하는 거지. 역시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데 말이야. 보잘 것 없는 인간들에겐 그래서 ‘자구책’이 없어. 결국 그렇게 서로를 괴롭히면서 결국 그렇게 평생을 사는거야. 평생을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하면서 말이야.


평생을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산다는 말이 단지 외모로 좁아지는 세계에만 적용되지는 않는 듯 하다. 돈, 지위, 직업의 끝도 없는 순위를 매기면서 '나 정도면 괜찮지, 근데 저 사람은 부럽다' 하는 무의미한 행동을 대부분의 사람은 계속 반복한다. 20대초반 특유의 반발심과 관찰력을 바탕으로, '나'는 이런 세상에 대한 분노와 의문을 쏟아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내면은 코끼리보다 훨씬 큰 것이고, 인간은 결국 서로의 일부를 더듬는 소경일 뿐이다. /
인간의 외면은 손바닥만큼 작은 것인데, 왜 모든 인간은 코끼리를 마주한 듯 그 부분을 더듬고 또 더듬는 걸까? 코끼리를 마주한 듯 그 앞에서 압도되고, 코끼리에 짓밟힌 듯 평생을 사는걸까?


소설 속에서 묘사된 못생긴 여자에 대한 대우와 조롱들에 대해 혹자는 예전이라 그렇다거나 지나친 묘사라고 할 것 같다. 필자도 2021년인 지금은 남의 비난을 의식해서라도 외모를 지적하는 게 일반적으로 지양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자의 외모에 대한 기준과 그 엄격함은 분명히 어느 정도 이상 유지되고 있다고 본다.

(남녀가 섞인 무리에서 늘 누가 제일 예쁜지 암암리에 순위가 매겨지곤 했던 경험은 차치하고 말이다)


물론 성별 차등 없이 외모가 아름다울수록 호감을 사는 건 같지만, 여전히 남자는 '능력', 여자는 '외모'가 중요하다는 구시대적 사고방식이 망령처럼 떠돌고 있다고 해야할까. 필자가 살아온 삶에 비추어보자면 그렇다.



비틀즈 노래를 다 들었다면 이 음악도 추천.


그러나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인간의 본능 자체를 탓할 수도 없다. 그러면 안 된다고 해서 눈길이 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그렇다면 결국 타고나게 주어진 외면을 넘어서 사람을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더 키우는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사회도 서로를 그렇게 봐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너무 막연하고 공허하지만...나부터 애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현실도 사실은 허무하다.



/

어쨌든 누군가를 부러워할 필요도, 우쭐할 필요도 없다. 소설 속의 말처럼, 우리는 결국 전부 넓은 고아원과도 같은 세상에서, 소경처럼 서로를 다 보지 못하고 더듬거리고 있을 뿐이니까.


필자 본인을 포함해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쭐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이기를, 스스로의 빛을 본인이 오롯이 간직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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