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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수경 Mar 09. 2024

혼자 걷는 교토

이방인이 되고 싶을 때


공들여 준비했던 시험에 떨어지고 난 뒤, 무작정 교토로 향했다.

도망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안다. 

그러나 당장은 이방인이고 싶었다. 

생활감이 묻어있는 내 공간에서, 내 침대에서, 내 위에 무겁게 자리한 코끼리같은 문제들의 무게를 느끼기엔 내가 나약했던 탓이다. 


언뜻 보면 한국인지 일본인지 분간도 안 갈듯한 거리 풍경.

그럼에도 여행을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분은 조금 나아진다.


한국보다는 평균적으로 높은 기온 덕에 걷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평소에 도보로 이동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여행에서는 얘기가 다르다.

특히 교토는 오사카와 달리 규모가 작은 도시라서,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가도 크게 힘들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기온 거리로 향하는 길목.

가장 교토스러운 곳 중 하나 같다.


어떤 남자가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돈이 되지 않는 일에 열심인 사람들을 보면 동경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작년에는 3월 말쯤, 한창 벚꽃이 만개할 때 교토에 왔었는데, 흩날리는 벚꽃은 아름다웠지만 그에 비례하는 인파에 치이느라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벚꽃이 핀 교토를 보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지만, 고즈넉한 교토를 느끼고 싶다면 나처럼 어중간한 시기에 가는 걸 추천한다. 


많은 여행지 중 왜 다시 교토에 왔는가,하고 자문해본다면 우선 접근성 때문도 있겠지만 마음에 들었던 카페가 많아서다. 나는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동시에 커피에 집착적인데(카페인 중독때문일지도), 교토의 유서 깊은 카페들을 돌아다니다보면 혼자 여행도 심심하지 않다.

혼자 카페에 가면 뭘 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는데, 그냥 있는 거다. 내가 '교토의 카페에 있음'을 즐기고, 일기도 쓰고, 카페를 구경하다보면 시간이 금방 간다. 사지는 않을 원두도 괜히 한 번 꼼꼼하게 살펴 보고, 디저트는 뭐가 맛있는지 사람들은 현지인 비율이 높은지 외국인이 많은지...그런 것들을 본다. 



내가 올리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사람이 많은 스마트 커피.

지난 번 교토 방문 때는 프렌치토스트와 팬케이크를 먹었었는데, 이번에도 다 먹지 못할 것을 알면서 두 가지 메뉴를 시켰다. 입에서 사르르 녹는 프렌치토스트와 따끈따끈한 계란이 들어가 있는 부드러운 타마고산도만으로도 충분히 교토를 재방문할 가치가 있었다. 

침대에서 게으름 피우는 걸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보다 웨이팅하는 게 더 싫기 때문에 8시 오픈에 맞춰서 갔더니 바로 입장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아침부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흡입하는 편이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마셨다. 



쇼핑을 위해 들른 빔즈에서 봤던 예쁜 디피. 평소 오프라인 쇼핑을 즐기지 않는 편이지만 혼자 여행에서는 남는 게 시간이기 때문에 괜히 가게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보는 시간이 생긴다. 그러다가 예정에도 없던 무언가를 경우도 적지 않지만 그것도 여행의 재미니깐.



크게 생각하지 않고 떠난 여행이라 지난 번 교토 방문 때 갔던 가게들 중 좋았던 곳을 재방문하는 식으로 여행했다. 언제 가도 맛있는 '우나기 소라'. 현금 결제를 유도하는 게 흠이지만 여행 중에는 이런 짧은 언짢음도 쉽게 잊혀진다. 



여행 내내 비가 왔다가 안 왔다가, 흐린 날씨가 계속 됐다.

9시도 안 되어 아무도 없는 철학의 길을 혼자 걸으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지를 처음으로 생각해보았다.

역시나 답은 없었지만 왠지 철학의 길에서 철학 생각을 하면 잘 되지 않을까,하는 그런 미신같은 마음으로ㅎㅎ


철학의 길에 바로 인접해있는 곳에, 지브리 세상 속에 들어온 것만 같은 아기자기한 카페가 있다.

botanic coffee라는 곳인데, 9시 오픈이라서 내가 첫 손님이 되었다.

나는 서투른 엉터리 일본어로, 사장님은 영어로 대답하는 이상한 대화로 주문을 마쳤다.

어떻게 알았지 외국인인거...


맛을 떠나서 너무 아름답잖아...

정말 애니메이션에나 나오는 팬케이크같아서, 혼자 보기 아까워 사진을 몇 장이나 찍었다.

맛도 있었지만 아늑한 카페의 따뜻하고 조용조용한 카페의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다정한 사장님이 계신 곳. 나중에 또 가야지


이 날 글 쓸 게 있어서 작업하기 좋은 곳으로 알려진 cafe bibliotic Hello!에 갔다.

아침부터 배부르게 먹은 터라 점심 생각이 없어서 점심시간에 갔는데, 2-3시쯤에 온 사람들은 카페에 들어오려고 웨이팅을 하더라. 교토나 오사카나 관광객도 많고 규모가 작은 업장이 많아서 인기 있는 곳은 웨이팅을 피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책이 빽빽하게 꽂혀있는 벽장을 마주하고 노트북으로 작업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곳.

라떼도 맛있었다.



이 날의 숙소는 료칸이었는데, 수없이 일본 여행을 다니면서도 호텔이 아닌 욕탕이 있는 료칸에 머무는 것은 처음이라 기대를 좀 했었다. 성수기에는 내가 지불한 돈의 네 배까지도 올라가는 곳이었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지만 직원들이 무척 친절하고 시설도 좋았다.

미리 예약한 줄 착각했던 일본식 조식을 못 먹어서 아쉬웠지만, 이런 아쉬움이 있어야 다음 여행도 있는거라 급히 정신승리를 했다. 


침대가 아니라 바닥에서 자는 게 괜찮을까, 싶었는데 침대보다도 푹신했던 침구를 준비해주셔서 아주 잘 잤다. 베개 위에 놓인 종이학과 쪽지가 너무 귀여웠다. 금각사, 은각사같은 것보다 이런 작은 귀여움과의 마주침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편이다. 



저녁으로 먹을 라멘집 웨이팅을 하다가 본 서점. 헌책방이겠지?

책방의 주인은 책을 아주 많이 읽은 사람일까?

일본어를 조금이라도 읽을 줄 안다면 들어가봤을텐데.

오픈 때 갔는데도 한 시간이나 기다렸던 라멘집은 별로 맛이 없었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많은데, 내가 이미 알고 익숙한 여행지만 가게 되는 걸 보면 나도 스무 살때와는 다른 마음을 가지게 되었나보다. 규모가 크고 경비가 많이 들고, 시간을 길게 잡아야되는 무거운 여행은 계획하기도, 실행하기도 힘에 부치는 걸 보면... 


그래도 잠깐이나마 이방인으로 지낼 수 있어서 즐거웠다!

무슨 내용인지 전부 이해가 되는 언어들과 내가 해야 할 일들로 가득 찬 일상에서 잠깐이나마 도망친 여행, 나름 성공적이었다고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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