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다이브 chapter1
네 캔 맥주가 만 원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만 삼천 원이 되었다. 생수는 언제 천원이 넘어갔는지 모르겠다. 삼천 원 아껴서 한강 뷰 아파트 못 산다! 거침없이 맥주를 골랐으나 손이 부족해 술을 품에 한가득 안은 꼴이 되었다. 물건들을 계산대에 우르르 쏟아내려 놓자 알바생이 재바른 손길로 바코드를 찍었다.
"봉투 필요하세요?"
"아니요."
집이 코앞인데 비닐 봉투에 백 원은 아깝지. 겸사겸사 환경 보호도 했다. 롱 패딩 양쪽 주머니에 맥주를 하나씩 쑤셔 넣고, 그것도 모자라 양 손에 미끌 거리는 캔을 억지로 틀어쥐고 집을 향해 종종 걸음을 했다.
ᅠ접이식 테이블 앞에 앉아 태블릿 PC를 켰다. 오늘의 배경음악은 타케우치 마리야의 「Plastic Love」. 이 노래는 너무 여름 느낌인가. 그렇다면 우타다 히카루의 「Automatic」으로. 고요한 방에 히카루의 앳된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볼륨을 올려 두었는데도 방이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사람들은 사랑 노래를 불러왔구나…. 가사를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대강 너를 사랑하는 게 오토매틱하다, 어쩔 수 없다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는 사랑, 또 다시 할 수 있나?
아직도 사랑 노래를 들으면 재현의 생각이 났다. 우리는 오 월에 만나 삼 년 뒤 오 월에 헤어졌다. 길다면 길지만 또 그렇게 장기 연애라고 할 것까지는 아닌 기간이었다. 처음부터 결혼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지만, 말미에는 결혼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었다. 재현과의 헤어짐 이야말로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말을 하면 친구들은 어쩔 수 없는 사랑은 있어도 이별은 없는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에게서 도망쳤나. 그런 결론에 다다르면 울적해졌다.
재현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비교적 규칙적이었던 생활 방식을 생각해보면 지금쯤 친구들을 만나 맥주를 마시고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고 한들 근황을 알 방법이 없었다. 새삼 함께 했던 시간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삼 년을 함께한 사람이 사라져도 회사는 가야했고, 일상은 계속되어야했다. 슬픔조차도 만끽할 수 없다는 게 서글프기도 했으나, 돌이켜보면 오히려 잘 된 일일지도 몰랐다. 실연의 감정에 실컷 잠식당할 기회가 있었더라면 지금도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 전의 연애 역시 육 개월, 일 년, 어떤 사람은 한 달-이건 내 연애에서 빼야겠다-정도로,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은 없었다. 내가 연애를 몇 번 한 거지? 오른손을 들어 한 손가락 씩 접어가며 세다 보니 손이 부족해 왼손으로 넘어갔다. 어쩌면 연애의 총량을 다 쓴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 연애를 한다고 해도 이미 밟아왔던 데이트 코스를 서로 모른 척 복습해야 할 터였다. 새로운 거 없을까. 그게 꼭 연애일 필요는 없었다. 머리가 팽팽 돌아가고 허리가 바짝 서는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어느새 비운 맥주 캔을 찌그러트려서 싱크대에 던져두었다. 금요일 밤이 아깝다는 말도 옛말이었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지하철에 실려 집으로 돌아오는 것까지가 한계였다. 일정을 조율하고, 약속을 잡고, 사람이 많은 핫 플레이스에 가서 부대끼는 게 더 고역이었다. 침대를 놔두고 바닥에 누워 아무렇게나 몸을 뉘였다. 방이 좁은 탓에 팔과 다리를 뻗자 옷장에 발끝이 닿았다. 보일러를 틀어 두어 뜨끈한 방바닥이 기꺼웠다.
반복재생해둔 노래가 귀에 익어 음율을 흥얼거릴 수 있게 될 때쯤 핸드폰 화면을 켰다. 안 읽은 메시지가 여든 일곱 개. 광고 메시지와 영양가 없는 단체 메신저 방을 제하면 남는 게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 중 흥미를 돋우는 메시지가 있었다. 삼십 분 전, 맥주를 담느라 씨름하고 있을 때 회사 동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 지연, 내일 역삼 쪽에서 와인 모임 하는 거 한 자리 비었는데 올래?
와인 모임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자리인지 파악이 안 되어서 바로 답을 보낼 수가 없었다. 원데이 클래스 같은 걸 다 같이 수강하는 건가. 술에 환장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주는 술을 마다하지도 않는 편이었다. 와인은 종종 마시기는 했지만 품종이나 원산지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었다. 토요일 저녁에 와인, 나쁘지 않지.
- 오키. 좋아.
강아지가 하트를 보내고 있는 이모티콘을 답장으로 보낸 뒤 인스타그램에 접속했다. 다들 비슷하게 금요일 밤을 보내는 건지, 비슷하게 보내는 사람들만 업로드를 하는 건지 대부분이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과 술잔 사진이었다. 그 중 몇몇은 연인을 태그해서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다들 어떻게든 사랑을 하며 사는구나.
반려거북이라도 키워야할까. 이왕이면 온기가 있는 동물을 키우고 싶었지만 거의 매일 열 시간씩 밖에 있는 주제에 그런 큰일을 벌일 용기는 없었다. 취기가 조금 올라오는 기분을 느끼며 핸드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무 무늬도 없는 흰색 벽지가 고요했다.
엄마 뱃속에서는 혼자 태어났는데 왜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을까.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시기가 끝났지만 돌이켜보면 오롯이 홀로 살아간 적은 없었다. 그러나 애인과 헤어지고 친구와의 약속에도 질린 지금, 섬에 표류된 로빈슨 크루소의 심정을 알 것만 같았다. 자취방은 나만의 제국이며, 이 방의 규칙들은 내가 표명한 것이었다. 나만이 살고 있는 이 방은 마치 외딴 섬 같아서, 매일 어떤 배가 지나가지는 않을지 기다리게 되었다. 어떤 배를 기다리는 지는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몸을 일으켜 태블릿 PC를 다시 켰다. 낭만이 있던 때로 돌아가야지. 삶이라는 건 너무 팍팍하다는 생각을 하며 OTT서비스를 뒤적거렸다. 요즘은 다 너무 각박해. 계산적이야. 새로운 걸 보고 싶었지만 재밌을 지를 셈하다 보니 결국 몇 차례나 봤던「미술관 옆 동물원」의 재생 버튼을 누르게 됐다. 익숙한 대사를 배경음악처럼 들으며 이불 속으로 파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