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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수경 Oct 07. 2024

남미새

러브 다이브 chapter2

  와인 모임이라더니 과연 와인은 네 병이나 있었다. 클래스 선생님은 언제 오시나 했지만 삼 대 삼으로 성비를 맞춘 모임에서 와인은 단지 이야기 소재일 뿐이었다. 대여한 파티 룸에 알고리즘이 선택한 최신곡이 흐르고 그 위로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요즘은 옷에 딸린 상품 태그처럼 엠비티아이가 이름 옆에 붙었다. 육 년 전 입사한 이래로 스스로를 소개하는 일이 드물었기에 그 순간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회사 동기인 선영 역시 한 층 높아진 목소리 톤으로 대화를 나눴다. 

듣는 순간 휘발되는 말들이었다. 동기를 제외한 여자 한 명이 카페를 운영한다는 것까지는 기억했는데, 남자 세 명의 직업은 점토처럼 뒤섞여서 누가 무슨 일을 하는 지 분간할 수 없었다. 

 “와인, 원래 즐겨 드세요?”

대각선에 앉은 남자가 빈 잔을 채워주며 자연스레 말을 걸어왔다. 와인을 따라주고 나서 병을 돌리는 모양새가 어디서 보고 들은 게 있는 것 같았다. 남자가 쉼표를 닮은 머리 모양을 드라이하느라 얼마나 애 먹었을지를 상상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신변잡기를 했다. 

 “칠 년차면 빨리 취업하셨네요. 능력자다, 능력자.” 

영혼 없이 칭찬해주는 말에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지금 마시고 있는 게 피노 누아인지 까베르네 쇼비뇽인지 전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말을 하는 대신 술을 홀짝였던 탓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운전은 하세요?”

 “아니요.”

음주 운전을 우려하는 사람인가. 

 “그러시구나, 요즘 서른 넘으면 하는 분들도 많던데. 별로 욕심 없으신가봐요.”

테이블 중간에 놓인 아몬드를 향해 뻗던 팔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의자를 조금 뒤로 빼 반 잔 남은 물을 꿀꺽꿀꺽 삼켰다. 남자의 옷깃에 새겨진 브랜드의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원하는 조건의 여자가 있구나, 이 사람. 

 “지현 씨는 인사 팀 일하시면 사람 잘 보시겠어요.”

 “그런 편이에요.”

 “전 어떤 것 같아요?”

선영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내고 싶었지만 분위기는 한창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남자 두 명도 나와 선영처럼 아는 사이인지, 친분을 과시하며 서로를 추켜세워 주고 있었다.

 “근데 진짜 빈 말이 아니라, 이 형 일 잘 해요. 완전 에이스에요, 에이스.”

 “엘리트가 겸손하네. 얘 무슨 대학 나왔는지 못 들으셨죠?”

어디 나왔는데요, 라고 받아쳐주는 선영과 여자 앞에서 남자들은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쉬지 않고 말을 했다. 승무원에게 대시를 받은 적이 있고, 입사 때부터 회사에서 유명했고···. 목부터 불그스레해진 모양새가 보기 좋지 않았다. 

와인 모임이라더니, 디켄딩을 하거나 잔을 바꾸지도 않았다. 품종도 원산지도 기억나지 않는 와인의 잔여물이 입 안에서 이리 저리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와인 이렇게 마시는 거 아니랬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섯 명의 어색한 남녀 사이에서 와인 네 병은 금방 동이 났다. 

 “와인 끝났는데, 술 더 사올까요? 아님 2차 가실 분?”

‘에이스’가 먼저 말을 꺼내자 취한 사람들이 뭐든 좋다며 왁자지껄하게 호응했다. 이 분위기를 뚫고 소신발언을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만 돌아가고 싶었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사람들 앞에서 취한 것 같다는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았다. 엘리트와 선영이 와인을 사러 간 사이 사람들이 취미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골프는 아무도 안 치세요?”

쉼표 머리 남자가 골프 이야기를 꺼내자 저마다 자신이 하는 운동 이야기로 받아쳤다. 

 “저는 테니스 쳐요.”

 “어, 저도 테니스 치는데!”

사람들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양새가 꼭 탁구공이 오가는 것 같았다. 쉼 없이 공이 오고 가는 경기를 지켜보는 나는 구경꾼이었다. 딱히 하는 운동이라고는 산책밖에 없는 내가 말을 얹기에는 빈틈없는 랠리였다. 요즈음은 하는 운동에도 트렌드가 있구나. 더 이상은 무리였다. 가방을 챙기고 구두에 발을 넣으며 때마침 와인을 들고 들어오는 선영에게 눈인사를 했다. 쉼표 머리 남자가 파티 룸의 일층 입구까지 쫓아 나왔다. 

 “지현 씨 오늘 재미없었어요? 근데, SNS 안 해요?”

은근히 건들거리는 말투에서 연락처를 줄 것이라는 자신감이 읽혔다. 밖으로 나오자 순식간에 싸늘한 바람이 덮쳐왔다. 코트 안으로 파고들어 오는 냉기에 몸이 덜덜 떨렸다. 오랜만에 신은 구두는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뒤꿈치를 매섭게 공격했다. 얼른 집에 가서 씻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아, 제 이름 지연이에요. 택시 왔다. 저 먼저 가볼게요.”

얼떨떨한 표정의 남자를 뒤로 하고 택시 문을 닫았다. 닫힌 문 안으로 오묘한 음식 냄새가 감돌았다. 기사님이 차 안에서 식사를 하신 지 얼마 안 된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속이 좋지 않았다. 말없이 창문을 내리자 차 안으로 들이 닥쳐오는 거센 바람에 구불구불한 머리가 물속의 미역처럼 휘날렸다. 

현관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구두를 반쯤 벗어던지고 화장실로 직행했다. 반나절동안 끼고 있던 렌즈 탓에 눈이 뻑뻑했다. 머리를 높게 묶어 올리고 클렌징 오일을 얼굴에 문질러 발랐다. 선영이 보낸 메신저에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 

- 잘 도착?

오일을 닦아내며 한 손으로 엄지 척 이모티콘을 보냈다. 문득 오늘 만난 사람들 중에 과연 사랑에 빠지게 되는 사이가 있을까 궁금해졌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서로를 간파하려 하고 셈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견딜 수 없는 거북함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외딴 섬에 가만히 있기만 하면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스스로도 알았다. 그런데 어째서 자기소개를 하면서 나는 ‘남미새’가 되는 기분이었을까. ‘남미새’는 ‘남자에 미친 새끼’의 줄임말로, 최근에 신입에게서 배운 뒤로 애용하고 있는 말이었다. 

노래나 영화가 재생되지 않는 화장실은 적막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있다가 집에 돌아오면 고요함이 더 도드라지곤 했다. 그러나 그 모임에서 충만함을 느꼈던 건 아니었다. 랠리에 끼지 못해 급급한 모습은 초라함에 가까웠다. 거울을 바라보자 아직 앳된 느낌이 있는 듯도 하지만 완연한 성인 여성의 얼굴이 보였다. 숨을 들이키자 산소가 아닌 다른 성질의 어떤 것도 결부되어 나에게 흘러들어오는 듯했다. 호흡하면 할수록 또렷해지는 그것은 분명 고독함이었다. 

폼 클렌징을 헹구고 크림을 바르면서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는 다시 사랑을 할 수 없다. 섬 밖으로 잠수를 하든, 헤엄을 치든 나가야 한다. 단순히 연애를 하고 싶다는 게 아니었다. 당장의 주말을 보낼 사람을 찾기 위해 아무나 만나거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심심풀이 땅콩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마음속에서 화수분처럼 흘러넘치는 사랑을 내밀 수 있는 상태가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가야 했다. 말 그대로 잠수를 하든, 헤엄을 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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