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영 Jan 14. 2022

집에서 목욕을 하면 안 되는 이유

얼마 전, 동생이 집에서 목욕을 하고 싶다고 난리를 쳤다. 물론 욕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아니, 실은 이 집에서 목욕은 불가능하다.


우리 집은 어릴 적부터 욕조에서 가족끼리 목욕을 하는 문화가 있었다. 동생과 나는, 근 초등학교 3학년까지 같이 했던 것 같다. 엄마 아빠 역시 늦은 오후 피로에 찌든 몸을 따뜻하게 지지는 목욕을 즐기셨다. 심지어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집 목욕탕 대신 공중목욕탕을 주 5회 성실하게 다니고 계신다. 그만큼 욕조에서의 행복한 추억이 많은데, 이 집에 이사 온 지 1여 년 만에 우리들의 아늑한 피로회복은 중단되고 말았다.


동생이 고래고래 목욕을 하겠다고 난리를 치자, 엄마와 나는 두손 두발 다 들고 말했다.

"그럼, 아래층에서 문 두드려도 너가 나가야 돼. 알겠지?"

"네가 아래층 분들 응대하고 경비 아저씨랑 얘기하고, 밑에 집도 살펴보고 보수공사도 다 해줘야 된다? 알겠지? 그럴 자신 있으면 목욕해도 돼!"


이렇게 겁먹을 만큼 말했지만, 동생은 묵묵히 욕조 물을 받을 뿐이다.

동생은 2시간여 동안 진득하게 콧노래가 나오는 반신욕을 즐기고, 그렇게 또 묵묵히 방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30분이 지났을까.


"쿵, 쿵, 쿵" 엄마와 나는 미어캣처럼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뭐..뭐지? 환청인가..?"

"쿵, 쿵, 쿵, 쿵" 아까보다 더 강하게 들렸다.

동생은 그제야 방에서 나와 아래층에서 올라온 손님과 경비 아저씨를 맞이했다. 그리고 한 차례 주의를 듣고는, 씩씩거리며 방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에잇, 집에서 맘 편히 목욕도 못하고!! 이런 집에 왜 살아가지고.." 동생은 약간 격양된 목소리로 성을 내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그렇다. 우리 집은 목욕을 하면 배수관이 약해서 아래층 천장에 물이 새게 된다.

사실 이곳에 이사 온 지 1여 년 만에 이 집의 실체가 드러났고,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물이 아래층 천장에서 흘러내리더니, 보일러를 틀 때마다 흐르는 물도 새어나가기 시작했고, 이윽고 화장실에서 쓰는 물도 아래층 천장 배수관에 고이게 되었다. 그렇게 수도관이 터질 때마다 공사를 5-6번을 했고, 처음 업체를 부른 뒤로는 모두 아버지와 동생이 직접 콘크리트를 뚫어 공사를 했다. 우스갯소리로 노년에 퇴직하면 수도관 보수 업체일을 해도 되겠다는 말도 나왔다. 그만큼, 수도관에 예민하면서 전문가인 셈이다.

동생도 중학생 때부터 수차례 공사를 도와 그 심각성을 알고 있지만, 목욕을 하고 싶은 본능이 너무 컸던 모양이다.


다행히, 이번 사태는 일시적으로 물이 새어 수도관이 터진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목욕물을 갑자기 많이 흘려보내서 아래층에 영향을 준 정도였다. 그 뒤로, 현관문을 누군가 크게 두드리는 소리는 동생에게 약간의 트라우마를 주었다.  

 

그리고 이틀 뒤, 아침 꼭두새벽부터 누군가 대차게 문을 두드렸다. 이번엔 관리사무소였다.

"이틀 전에, 물이 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이 동네는 무시무시하게도, 아파트 전체적으로 겨울철만 되면 수도관이 터지는 게 유행(?)이라서 관리사무소에서는 득달같이 듣고 업체를 연결해주려 달려온다.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다.

엄마는 웃으면서 "아, 더 이상 아래층에서도 연락이 없고 그래서 괜찮은 것 같아요~"

"그래요? 허허 알겠습니다."

우스운 점은, 이틀 전에 일어난 일을 이제야 물어본다는 점이다. 엄마도 어이없다는 듯이 뒤돌아 섰는데 동생이 방에서 나왔다.

약간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누구예요..? 괜찮아요?"

괜히 기운 빠진 동생의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아프면서 웃겼다.


동생은 그 뒤로 목욕에 대한 미련을 버린 것처럼 굴더니, 대뜸 밥을 먹다가 말했다.

"근데, 사실 우리 집에서 목욕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해요. 노란 바가지로 다 쓴 목욕물을 세면대 밑으로 조금씩 흘려보내면 돼요. 그럼 아래층에 안 새요. 그날은, 제가 너무 귀찮아서 한꺼번에 물을 버렸거든요.ㅎㅎ"

"이야, 잘됐네. 그럼 앞으로 그렇게 하면 되겠다!!"

"제가 실험을 해봤는데, 괜찮은 것 같더라고요."

우리 모두는 나름 대안을 찾아 흡족스러운 미소를 지었지만, 아무도 목욕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심지어 동생조차도, 욕조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반려묘 야꿍이만의 놀이터가 되었다.


아마, 이사를 가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집 습작의 고수를 만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