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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영 Jan 16. 2022

외할머니가 죽음을 말씀하셨다

오랜만에 외할머니 집을 찾아갔다. 할머니는 올해로 82세, 다행히 무탈하게 살고 계신다. 예전보다 걸음은 많이 느려졌고, 안면근육이 굳어 미소 짓는 것이 힘들다 하시지만 또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드리면 금세 씨익 웃으신다. 그래도 어릴 적 외할머니 손에서 자란 덕에, 할머니와의 예쁜 추억이 많아 팔팔했던 그 시절이 그립곤 하다. 할머니로부터 바둑과 장기, 고스톱을 배웠고 7살 동갑내기 중에는 타짜스러운 실력이었다.

특히 자전거와 연날리기를 가르쳐주신 할머니가, 그렇게 열심히 뒤에서 밀어주셨던 할머니가, 이제는 내가 앞에서 모셔야 하는 분이 되었다.  


그런 할머니에게 대뜸,

"할머니, 120세까지 만수무강하셔야 돼요. 제 자식들한테도 고스톱 알려주셔야죠."

"응? 뭐하러 그렇게 오래 살아."

"왜요? 살 수 있는 한 오래오래 살면 좋잖아요.ㅎㅎ"

"하영아, 늙고 병든 채로 오래 살아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이야. 나도 힘들지만, 자식들도 먹고살아야 하는데, 나를 쳐다볼 시간이 있겠어? 건강하지 못한 채로 120세까지 산들 아무 소용이 없단다. 아픈 몸으로 오래 살 바에야 빨리 죽는 게 낫지.”


옆에서 듣고 있던 엄마도 거들었다.

"그래, 할머니가 지금은 움직일 수라도 있지. 그런데, 꼼짝 못 하고 누워있으면 엄마도 오래 감당 못해. 너도 엄마 그렇게 되면 병원에 두고 갈 거잖아?"


나는 할머니가 해주신 얘기를 곱씹고 있다 갑자기 날아온 질문에, 웃으며 말했다.

"엄마,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운동해서 잘 움직이셔야 돼요, 알겠죠?

할머니 그래도 계속 건강하게 살아계셔야 돼요, 알겠죠?"


집에 와서도 할머니와의 대화는 머릿속에 맴돌았다.

건강하지 못하면 오래 살아도 아무 소용없다니.. 무서운 말이었다.

할머니가 그렇게 단호하게 죽음을 말씀하신 건 처음이었다. 마치 건강이 나빠지면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는 것처럼 느껴져 씁쓸했다. 특히 요즈음, 어딜 가나 근육이 없어 보인다는 얘기를 자주 들어 걱정이었는데, 걸음이 느려진 할머니를 보니 더욱 운동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적어도 하루 1시간은 고강도의 근력운동을 하기로 다짐했다. 평소 숨쉬기 운동과 걷기, 계단 오르내리기 수준의 움직임을 나름 운동으로 정의 내렸는데 자기 합리화는 그만하기로 했다.


올해 좌우명인 단단한 사람이 되자에 걸맞게 근육을 만드니 외면부터 단단해진 기분이 들었다. 건강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포함되기에 정신적 건강 도모를 위한 독서모임도 나가기 시작했다. 모임에서 처음으로 다뤘던 주제는, 간단한 밸런스 게임형 질문이었다.


둘 중 더 나은 것을 고르자면?

<내 장례식장에 아무도 안 오기> vs <내 결혼식장에 아무도 안 오기>


찰나의 고민 끝에, 나는 <내 장례식장에 아무도 안 오기>를 골랐다. 결혼식장에 아무도 안 온 건, 실제로 목격할 수 있어 타격이 크지만 장례식장에 아무도 안 온건, 내가 죽은 뒤에 벌어진 일이라 괜찮다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천국에 올라가 장례식장 풍경을 쳐다볼 상상을 하니, 비참하고 쓸쓸했다. 아니, 얼마나 엉망으로 살아야 사람들이 장례식도 안 오지? 그런데 문득 할머니와의 대화를 떠올려보니, 오랫동안 병들고 아픈 상태로 죽으면 주변 사람들이 너무 고생해서 정말 장례식장에 아무도 안 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죽음에 대해 고민해 볼 계기가 많았는데, 결론은 건강이 최고라는 것이다. 아무쪼록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 주지 않고 아주 오래오래 산다면 인간의 삶을 여한 없이 누린다고 본다. 환경문제로 심각해진 미래 모습이 궁금해서라도, 꼰대보다 더한 꼰대 소리를 듣더라도 22세기의 땅을 딛기 위해 150세까지 건강하게 살다 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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