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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영 Jan 16. 2022

코트 하나가 불러온 고백

얼마 전, 급하게 상경할 일이 생겼다. 왠지 내가 살고 있는 지역보단 훨씬 추울 것 같아서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방한 느낌으로, 두꺼운 겉옷을 바리바리 챙기는데 엄마 코트가 눈에 띄었다. 그 옷은, 엄마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내가 추천해준 옷이다. 마침 집에 아무도 없길래 살짝 걸쳤는데 생각보다 나에게도 찰떡이었다.  


'아, 어떡하지? 서울까지 가져가면 분명 화내시겠지?'

서울에 오랫동안 머물러야 해서, 아직 엄마도 입지 않은 새 옷을 먼저 가져가면 화내실 게 분명했다. 그래도 조심스레 엄마의 의중을 물었다.


"뭐? 그 코트를 가져간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ㅎㅎ"

"아니, 너무 추울 것 같은데 좀 입으면 안 될까? 입을 옷이 없는데, 살 시간도 없어. 당장 내일이란 말이야."

"정 가져가고 싶으면, 돈을 내."

"대여료 같은 거야..? 아님 돈 주고 사라는 뜻이야?"

"코트 가격의 절반만큼 내면, 언제든지 입고 갈 수 있게 해 줄게."

"엄마, 무슨 당근 마켓도 아니고 그게 뭐야. 내 옷은 마음대로 빌려가잖아."

"아니, 이건 좀 다른 상황이지. 엄마도 한 번도 안 입은 옷을 서울까지 가져가 며칠 동안 입는다잖아. 그러니 돈을 받아야지."

"가족끼리 너무한 거 아니야? 엄마 마음도 이해는 되는데, 아니 사실 이해가 안 돼."

"요즘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합리적으로 생각해봐. 너 같음, 비싸게 주고 산 예쁜 코트를, 그것도 새 옷인데 멀리 떠나는 사람한테 빌려줄 수 있겠어? 그러니 절반만큼만 돈 내면 언제든 입게 해 준다니까? 바로 근처에 나갈 때는 당연히 그냥 빌려주지. 근데 서울은 너무 멀잖아."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나는 괜스레 상처받은 마음에, 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가족인데 너무 인정사정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성적으로 따지면, 엄마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별수 없이, 엄마에게 다시 차분하게 물었다.

"그럼, 코트의 3분의 1 가격을 낼 테니까 빌려줘. 나도 나름 이해하려고 애쓴 거야."

"안돼. 절반 정도는 내야지." 엄마는 단호했다.

결국, 다시 씩씩거리며 말문을 닫았다.


저녁시간이 되었다. 네 식구 다 같이 모여 저녁을 먹고, 아빠와 엄마는 후식으로 약주를 하고 계셨다. 나는 아빠에게 아까 있었던 코트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다 듣고는, 호탕하게 웃으시면서

"에휴, 그건 좀 심했다." 라며 내 편을 들어주셨다.

그러자 엄마는 그 얘기를 왜 또 꺼내냐며, 크게 화를 내셨고, 나는 엄마 눈치를 보며, 아니 그냥 내가 이상한 건지 궁금해서..라고 둘러댔다.


그런데, 아빠가 술에 취했다는 점을 간과하고 말았다. 아빠는 갑자기 엄마의 외가댁 얘기를 하면서 엄마의 언행을 꾸짖었고, 결국 나로 인해 두 분은 상처뿐인 말싸움을 하게 되었다. 나는 코트 사건을 말한 뒤, 방에 곧장 들어갔고, 방에서 조금씩 언쟁 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오후에 엄마로부터 쌓인 감정이 엉켜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늦은 밤, 엄마가 내 방에 찾아왔다.

"너는, 그렇게 엄마 아빠 사이를 불 질러 놓고 왜 사과 한마디 안 하러 오냐?"

"아, 그게 이것저것 바빠서.. 죄송해요. 정신이 없었네요."

"아까 엄마가 아빠한테 무슨 소리까지 들었는지 알아? 내가 코트 하나 때문에 그런 얘기까지 들어야 해? 그리고 너도, 이미 끝난 일을 왜 굳이 얘기해서 분위기를 안 좋게 만들어?"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잘못한 점이 충분히 많기에, 감정적으로 굴었던 과거의 못난 나가 괴로웠다.

그렇게 엄마는 한참을 훈계하셨고, 나는 들으면서 반박도 하고, 수긍도 하며 깊은 대화를 이어갔다.


"얼마 전에 엄마가 외가댁에 힘든 일 있었던 거 알잖아. 그래서, 아빠가 오늘 점심에 엄마 위로해주고 많이 도와줬단 말이야. 근데, 네가 저녁에 그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아빠가 180도 바뀌어서 갑자기 엄마 욕을 하잖아. 지금 심정이 어떤지 알아?" 엄마는 격정적으로 얘기하시다가,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다.


엄마가 눈물을 보인 적은 살면서 두 번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강인한 엄마가 한없이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엄마의 눈물을 보자, 나도 한없이 죄송스럽고 고통스러웠다. 내가 정말 정말 잘못했구나. 엄마 마음이 문드러질 때까지 너무 무심하게 살았구나.


그리고 문득, 따뜻한 말 한마디 못 해 드리고 외로울 때 같이 있어주지 못한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뚝뚝하고 과묵한 아버지와 살면서 한 여자로서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고, 어린 시절 가정에서도 사랑보단 매로 자랐고, 갈수록 애정표현이 줄어드는 자식들로부터 결핍감을 많이 느끼셨을 것이다. 늘 우리에게 표현하고, 노력하셨지만 우리는 늘 받는 것에 익숙해있었다. 삶에 있어 인간관계를 1순위로 두지만, 그 인간관계에 가족을 포함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엄마는 그렇게 내 품에 안겨 연신 미안하다고 말씀하셨고, 나는 고개를 저으며 엄마를 토닥여 줄 뿐이었다. 그리고 마치 우리 반 아이들에게 말하듯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엄마, 전업주부로 살면서 엄마가 인정받고 칭찬 한번 들을 일 없어서 많이 힘들었지? 그런데, 내가 말은 안 했지만 엄마는 이 세상 엄마들 중에 진짜 최고야. 옛날에는 몰랐는데, 엄마라는 직업이 진짜 대단한 거더라고. 신경 쓸 게 너무 많고, 뭐든지 잘해야 하잖아. 나는 솔직히 엄마만큼 멋진 엄마가 될 자신이 없어. 엄마는 지금도 못하는 게 없잖아. 주위 사람들한테 휘둘리지도 않고, 그만큼 너무 곧아서 엄마가 힘들 때가 있지만, 그게 진짜 멋있는 것 같아. 난 엄마가, 내 엄마라서 너무 행복하고 고마워. 평소에 표현 못해서 미안해."


엄마는 또 겸손하게 아니라면서, 눈물을 닦고는 빨리 잘 준비하라며 방을 나왔고, 나는 감정에 복받쳐 고개를 숙였다. 코트 하나 때문에 엄마가 눈물까지 흘리게 될 줄이야. 그래도 덕분에, 엄마의 그간 힘들었던 감정 고백을 들을 수 있었고, 딸로서 지내온 나날을 반성하게 되었다. 그날 밤, 엄마와 메신저로도 따뜻한 메시지를 주고받고 웃으면서 현관을 나설 수 있었다.


며칠 지나, 또다시 투닥거리며 언쟁을 벌이는 모녀 사이가 됐지만 진지하게 서로의 마음을 나눴던 그날 밤 덕분에 조금 더 엄마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평소 조금이라도 대단한 일을 발견하면, 엄마에게 즉각 칭찬을 해드렸다. 칭찬은 최대한 과장되게, 하지만 진심을 담아 해 줘야 좋아하신다. 부끄러워 손사래를 치지만,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면 괜스레 뿌듯하다. 앞으로도 그런 부끄러운 엄마의 모습을 많이 많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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