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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가사리 Oct 30. 2022

말랑말랑한 마음

네덜란드 | 스트룹 와플

일기장에 이름을 붙였던 시절이 있었다. <안네의 일기>를 읽은 직후였다. 내 또래였던 그녀는 자신의 일기장을 ‘키티’라고 불렀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적은 그녀의 일상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 편의 소설처럼 느껴지던 이야기 속 소녀를 만난 건, 한참이 지난 후였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엔 <안네 프랑크의 집>이 있다. 실제로 그녀와 그녀의 가족이 나치의 감시를 피해 은둔생활을 했던 곳이다. 사전 예약이 필수지만, 다행히 당일에 취소한 표가 있어서 예약 후 방문할 수 있었다. 안내를 따라 천천히 들어가니 입구에 너무나 익숙한 안네 프랑크의 흑백사진이 보였다. 그녀는 내가 만났던 책 속의 모습 그대로였다. 만약 그녀가 지금 살아 있다면 아흔이 넘었으니, 몇 해 전 돌아가신 나의 외할아버지의 연배와 가깝다.       


좁은 계단을 오르고 공간이 나오고 벽 곳곳엔 안네와 가족들의 사진, 그녀의 일기 속 문구가 적혀있었다. 오래전 그녀의 흔적을 살펴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앞에서 보면 책장이지만 밀면 뒤채로 연결되는 회전식 비밀 책장, 그녀의 자라는 키가 표시된 벽지, 자신이 좋아하는 포스터와 엽서를 붙인 그녀는 보통의 10대 청소년이었다. 유일하게 남아있다는 그녀가 나온 영상을 보았는데, 1941년 7월 22일 이웃의 결혼식에 우연히 찍힌 모습이었다. 짧게 흘러간 그 영상 안에서 그녀는 움직이고 있었다. 저널리스트, 작가가 꿈이었던 소녀는 자신의 남긴 기록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여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는 걸 상상이나 했을까.    

  

앉아서 영상을 볼 수 있던 공간, 빔 프로젝트에서 배우 엠마 톰슨이 이야기하는 인터뷰의 한 대목이 마음에 들어왔다.      

“.. All her would-haves are our opportunities.” 


지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 기회는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것이었다. 자유롭게 밖을 다니고, 여행을 하고, 마음껏 책을 읽고, 친구들을 만나는 이 모든 평범한 기회들을 안네는 이 작은 공간에 숨죽이고 있으면서 간절히 바랐다.      


1층 서점에서 한글 완역본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발견하고 구입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슈퍼마켓에서 <스트룹 와플>을 샀다. 네덜란드의 국민 간식이라 불리는 이 과자는 격자무늬의 바삭하고 얇은 와플 사이에 달콤한 시럽을 발랐다. 머그잔 위에 뚜껑처럼 덮을 수 있는 사이즈를 골랐다. 따뜻한 홍차나 커피가 담긴 컵 위에 딱딱한 스트룹 와플을 얹으면, 그 안의 시럽이 조금씩 녹으면서 스트룹 와플도 말랑말랑해진다. 오늘 밤엔 이제 나보다 나이가 어린 책 속의 안네를 만나야지. 가방에 책과 스트룹 와플을 잘 챙겼다. 더 이상 책 속의 그녀를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서, 숙소로 가는 걸음을 서둘렀다.      


Amsterdam. Netherlands _ 따뜻한 차 위에서 말랑말랑 해지는 스트룹 와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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