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바르셀로나 | 꼬르따도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가 아닌 다른 이를 만나게 될지 몰랐다. 이미 바르셀로나를 다녀온 이들의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조언을 귀담아듣지 않고, 가우디 투어를 예약하지 않았더라면, 해박한 지식을 가진 한국인 가이드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가우디의 건축물에 감탄만 하며 돌아왔을 것이다. 이어폰을 끼고 가이드의 설명을 따라 고딕지구를 걸으며 들었던 거장 피카소의 이야기, 마치 듣는 오디오 북처럼 맛깔스러운 설명에 심취해 있을 때 가이드가 말했다.
"자, 피카소 그림의 배경이 된 거리를 여러분에게 공개합니다."
오래전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보았던 그의 그림 <아비뇽의 처녀들>의 배경은 바르셀로나에 있었다. 프랑스의 아비뇽이 아닌, 바르셀로나의 아비뇽 거리. 환락가였던 그 거리의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그린 그림은 당시엔 혹평을 받았지만, 이후 입체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피카소의 대표작이 됐다.
바르셀로나엔 가우디와 함께 피카소도 있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만남, 그래서 더욱 인상 깊었던 그의 이야기. 옛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바르셀로나의 고딕지구를 걸으며 피카소가 청년시절 자주 갔다던 장소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1897년에 오픈한 네(4) 고양이(Els Quatre Gats) 카페였다.
"피카소의 그림을 보면서 나도 저만큼 그리겠다는 분들 있으시죠. 여러분, 미술관에서 피카소의 옛 작품들을 꼭 보시길 바라요. 열일곱 살의 피카소는 이 카페에서 최초로 전시회를 열었어요. 이 카페의 메뉴판 그림도 피카소가 그렸죠."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바로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미술관을 예약했다. 이미 유명해진 피카소의 그림은 단순한 것들이었지만, 그런 하나의 선으로 표현되기까지 그의 그림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왔는지 볼 수 있었다. 거장은 하루아침에 탄생하는 게 아니라, 수많은 시간과 연습으로 완성되어 간다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 그는 노년에는 도자기도 만들었다. 그의 삶에 예술은 숨 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게 아니었을까 싶었다. 남편과 나는 피카소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열일곱 살의 그가 첫 전시회를 열었다는 카페에 갔다. 피카소를 비롯한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는 곳, 그곳에 앉아 꼬르따도 두 잔을 주문했다.
커피와 우유의 함량이 1:1, 같은 비율로 만든 진한 커피는 작은 잔에 나온다. 메뉴판에 없어도 어디서나 있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커피라고 가이드는 말했다. 스팀 된 우유를 넣는 콘레체와 달리 꼬르따도는 뜨겁지 않은 우유를 넣어 좀 더 커피맛이 진하다. 함께 준 작은 종이팩에 담긴 설탕을 꼬르따도 위에 솔솔 뿌린 후 마신다. 에스프레소처럼 아주 쓰지도 않고, 카페라테처럼 배가 부르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달달하고 진한 커피. 수년 전 이곳에서 자신의 그림을 전시하며 벅차올랐을 열일곱의 피카소를 생각하며, 천천히 꼬르따도를 음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