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잡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현희 Aug 31. 2024

생존권

2024. 08. 08.

내가 결혼하기 전 아빠가 배우자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 애는 얼핏 보면 까탈스러워 보이지만 살아보면 굉장히 무던한 사람인 걸 알게 될 것이다. 단, 잘 먹.여.야 된다. 배고프고 졸리면 짜증낸다.” 


왜 굳이 저런 말씀을 하시나 싶었으나, 배우자 말에 의하면 살아보니 정말 그러했다고 한다. 결혼 후 배우자의 요리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돌이켜보면 작년에 지부장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점에 중집 회의에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화를 냈던 이유도 저녁때가 한참 지났는데 밥을 주지 않아서였다;; 이것이야말로 인권침해가 아닌가! 싶어 항의했었고 이후로 식사시간은 칼같이 지켜지고 있다. 그러나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회의 문화는 그대로이고 나는 여전히 밤 10시 이후로는 제정신이 아니다;;


8월 7일이었던 어제 기재부 앞에서 공무원, 교사 임금인상과 생존권 보장 요구 집회가 있었다. 핸드폰에 온도를 낮추라는 알람이 뜰 정도로, 너어어어어어어무 더웠다. 대전지부 조합원 단톡방에는 "너무 더워 삼겹살이 될 것 같았지만 함께 하니 견딜만했고 하하블라블라.."라고 썼지만, 사실 전혀 견딜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생존권 보장 위해 나왔다가 내가 죽겠구나 싶었다. 그 외에도 집회를 둘러싸고 생긴 몇가지 개인적 불만 포인트는 목구멍으로 삼켰지만, 


그 과정에서 생긴 감정을 괜히 배우자에게 쏟아냈던 것 같다. 오늘 아침 눈을 뜨니 어제 배우자에게 온갖 짜증을 내고 다툼을 벌인 게 후회됐다. 배고프거나 졸렸던 건 아닌데 피곤, 스트레스, 호르몬 등의 영향이었고 위기감이 느껴졌다. 가족은 내 최후의 안전지대이며 절대 무너뜨려선 안된다. 나는 여전히 기본적 생존 욕구에 충실한 사람이고, 훈련한다고 개선될 것 같지 않다. 그래야 될 필요도 없다. 생존과 평화를 위해 많이 먹고, 푹 자고, 푹 쉬어야 될 타이밍이다.


마음먹고 배우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는 당신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 너무 비장한 것 같아 한 줄을 추가했다. '그 다음은 범준이'.


----------------------------


2024. 08. 09.

나는 사실 집회 체질이 아니다. 집회 체질이 따로 있나?라고 물을 텐데, 관찰과 경험에 따르면 집회를 통해 힘을 얻거나, 적어도 나처럼 힘들어하지는 않는 사람들도 꽤 있다. 당연히 다른 그룹에 비해 운동판에 그런 분들이 더 많다. 나는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망실대회도 열고(망한 교육실천사례대회), 교직문화 토로 대회도 열고, 갑자기 페북분회도 만들었으니 사람 모으는 걸 좋아하는 유형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실 의미나 목적 없이 사람 만나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방학 때마다 훌쩍 떠나버렸던 큰 이유 중 하나가 한국어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 혼자 있고 싶어서다. 


집회에 참여한 후 혼자 시름시름 앓을 때가 있다. 피곤해서가 아니라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대전지부 자체 집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손으로 열고 닫아서인지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엊그제 민주노총, 한국노총은 물론 다양한 공무원 노조들이 결합한 공무원 교원 임금인상 집회 같은 경우도, 더위만큼이나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 번뇌였다. 난 누구이고, 여긴 어디인지 모를 익숙하지만, 여전히 적응은 되지 않는 허무와 번뇌에 또다시 휩싸여서 억지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지금 당장 큰 의미를 찾을 수 없더라도 '어쨌든 연대도 연습이다', '저연차 교원과 공무원들에게 저임금은 생존의 문제다'라고 생각하며 가까스로 앉아 버텼다. 왜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집회에 집중하지 못하고 비판적인 생각이 들까, 조금은 자책도 했다. '조금'이라고 썼지만 사실 방황과 자책은 나의 두번째 이름이다. 


콘크리트 팔뚝질 사진을 보고 ‘할거 없어 저러는 거 아니냐’, ‘이제 저런 투쟁은 상징적이지도 않다’라는 말, 당연히 할 수 있다. 당장 나부터도 그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고 싶을 때 한번쯤 멈춰서, 당신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이미 육중한 고민을 안고 뜨거운 콘크리트 바닥에 앉았을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게 좋겠다. 특히 당신이 선배라면 '여전히' 이렇게밖에 싸우지 못하고 있는 후배들을 위해 '나는 그동안 무엇을 했나'라고 생각해 보거나, ‘수고했다’라는 말 한마디 건네는 것으로 족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을 통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