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09. 11.
서울에 제법 자주 가지만 여전히 길을 헤맨다. 월요일 서울에서 늦은 회의를 마치고 대충 잠을 잔 후 다음 날 1호선을 타고 집회가 열리는 용산 쪽으로 가려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전철이 오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것 같아 벤치에 앉은 청년에게 물었다. "혹시 이 쪽 전철은 안 와요?" 샌드위치와 사이다를 야무지게 씹고 있던 청년이 귀에 꽂은 이어버즈를 빼고 일어나더니 공손하게 답했다. "아임낫코리안. 아이엠투어리스트."
깜짝 놀라 쏘리쏘리를 외치고 다른 분에게 여쭤보자 "안우와~줘쩍으로 가~"라고 손으로 안내를 해주셨다. '급행'이란 단어에 내가 모르는 뜻이 있는 건가, 왜 신길 방면으로 갈 것처럼 표지판을 만든 걸까 고뇌하며 다른 철로로 넘어가고 있는데, 샌드위치 청년이 헐레벌떡 날 쫓아왔다. 오지않는 전철을 한참 기다리며 나처럼 혼란에 빠져 있던 모양이었다. 대만인쯤 되나 보다 싶었던 청년은 놀랍게도
러시안이었다. 우리는 마침내 전철을 잡아 타고, 문제적인 표지판, 한국의 날씨, 러시아의 부정부패, 전지구적 기후위기, 휴학 중인 자신의 미래 고민 등에 대해 담소를 나누다가, 모스크바나 대전에 오게 되면 서로 가이드를 해주자며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남영역에서 내린 후 땀을 웩웩 분출하며 용산 전쟁기념관까지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러시안이 문자를 보내왔다. 여행 중에 나같은 "open and kind person" 을 만나 신기하고 즐거웠다고. 문자를 읽는데 문득 멍해졌다. 아 맞다, 나 원래 그런 사람이었지...개방적이고, 시원시원 친절하단 평을 자주 들었었는데, 왜 요즘 나는 스스로를 늘 화가 난 한 마리의 짐승처럼 느낄까, 무엇이 문제일까... 생각하는데,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지며 집회가 시작됐다. 대구지부장님에게 물 한 병을 얻어 마시고, 발언하는 우리 대전지부 새내기 조합원들을 응원하고, 우리 부지부장님, 대외협력국장님과 지하철에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혼자 깊은 우물에 빠져 있다가 길어 올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에서 누굴 만나도 스스럼없이 친해지던, 오픈 앤 카인드 퍼슨이었던 나는 지금 자라고 있는걸까, 늙어가고 있는 걸까, 솔직히 모르겠다. 어제 먼지를 뒤집어쓰고 터벅거리며 걸었던 길 위에서 아무밴드의 '사막의 왕'이라는 노래가 떠올랐고 지금도 듣고 있다. 좋네 오랜만에 들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