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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Oct 18. 2024

학교폭력법이 짓밟은 아이들의 정원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대신 싸워주는 어른’이 아니다

https://www.educha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4854



영화 ‘우리들’(윤가은 감독, 2016)은 교실에서 소외된 초등학생 ‘선’이 방학 동안 친해진 전학생 친구 ‘지아’와의 관계를 지키고자 분투하는 과정을 그린다. 다정했던 둘의 관계는 작은 오해, 각자의 콤플렉스, 둘 사이에 끼어든 다른 친구 ‘보라’로 인해 단단히 꼬이고 급기야 따돌림, 폭로전, 몸싸움까지 벌어진다. 극적인 반전이나 화해는 성사되지 않았다. 영화는 피구 경기가 한창인 운동장 복판에서 이뤄진 ‘선’과 ‘지아’의 조용한 눈맞춤으로 끝을 맺는다.



마지막 풍경의 암전 후 들려오는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 속에서 나는 불안한 상상을 멈추지 못했다. 만약 실제 학교에서 이 일이 벌어졌다면? 선, 지아, 보라 중 한 명의 보호자가 학교폭력 신고를 했다면? 영화의 주인공들은 (세상의 모든 아이와 인간이 대개 그렇듯) 완벽한 천사도 악마도 아닌 복잡 미묘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학교폭력 사안 조사가 시작되고 학폭위가 열렸다면 모두 자신이 일방적 피해자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어떤 부모는 내 아이에게만 일방적 낙인이 찍히지 않도록 소위 선빵을 날려 방어 알리바이를 구축할 수도 있다.



상대의 약점을 학급에 공개하며 다툰 아이들을 모아놓고 담임교사가 꾸중하는 장면이 있다. 지아는 선생님에게 "왜 저한테만 그러세요?"라고 따져 묻는다. 영화 속 선생님은 의연하게 대처했지만, 현실의 선생님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지 모른다. 선생님이 나만 꾸짖더라는 아이의 말만 듣고 학부모가 민원을 넣거나, 교사가 학교폭력을 축소·은폐하려 했다며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도 있다. 열심히 생활지도 하다가 민원에 시달리느니 학폭 사안 처리 절차에 맡기라고 동료들은 권유하지 않았을까. 이것이 바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21세기 한국 교육현장의 고민과 현실이다. 영화 '우리들'의 장르는 잔잔한 드라마다. 실제 학교 현장은 복수 스릴러, 법정 드라마, 블랙코미디 장르로 진행되고 있다.



2004년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후 20년이 흘렀다. 법의 취지, 의미, 효과성 등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학교는 법정이 되었다. 아이들 간의 작은 다툼에도 사법 논리를 적용하는 사례와 경향이 증가했다. 변호사와 중개인이 학폭 조치에 개입해 소송전을 벌이고, 수사관도 밝히기 어려운 진실을 교사에게 밝히도록 요구해 학교가 만신창이가 되는 사례도 다수 발생했다. 학폭 책임 교사들은 극심한 스트레스와 과로에 시달렸고 재심 청구, 행정 소송, 행정 심판 건수도 큰 폭으로 증가했다.



무엇보다 교육 자치 생태계에 필요한 빛과 물, 거름이 박탈되며 아이들의 정원이 무참히 짓밟히고 있다.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한 발 뒤로 물러나 지지하고 격려하는 양육자는 아이에게 빛과 같은 존재다. 하지만 법정으로 변한 학교에서 부모는 아이의 변호인, 법정 대리인의 역할을 맡는다. 헬리콥터 양육 방식, 과잉보호 학부모를 비난하긴 쉽다. 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의 사소한 말다툼까지 학폭 사안으로 다뤄 아이가 징계를 받고 행정 심판과 소송으로 이어질 수 있는 현실이다. 보호자가 처벌과 낙인의 공포를 느끼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다수 아이가 한 공간에서 생활하는 학교에서 갈등과 충돌은 불가피하다. 그 과정에서 문제해결능력, 감정조절능력,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 차이를 조율하는 능력을 기르도록 조력하는 교사는 아이에게 물과 거름 같은 존재다. 하지만 현실의 학교에서 교사는 갈등 발생 즉시 진위를 가리고, 공격적 민원과 엄청난 양의 행정업무를 처리하고, CCTV로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작업 등에 소진된다. 퇴직 교원이나 경찰 출신의 학교폭력 전담 조사관에게 일부 행정업무를 외주하는 방식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아이들에게는 행정사무관이 아닌 교육적 개입과 중재 역량을 발휘하는 선생님이 필요하다.



1980년대 후반 미국에서 진행된 '바이오 스피어 2' 실험은 어린나무가 제대로 자라려면 바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밝혔다. 바람이 없는 상태에서 자란 나무는 충분한 성숙기 이전에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인간의 성장도 이와 흡사하다. 아동은 먼지, 세균, 기생충에 노출될 필요가 있다. 이를 차단하면 면역계 발달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다. 심리적 면역계 역시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갈등, 차이, 좌절을 통해 자기 통제, 고난에 대한 내성 등을 기른다. 성장기 아이들의 갈등과 충돌의 원천적 차단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아이들은 싸우면서 자라니 방임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법정이 된 학교는 안전지상주의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바람을 맞으며 자라나야 할 공간에 어른들의 대리전만 난무하고 있다. 작은 다툼마저 법정 드라마로 이어지는 학교에서 아이들은 자치능력, 자기 통제와 조율 능력 등을 기르기 어렵다. 학교폭력예방법은 폐지 혹은 폐지 수준의 전면 재개정이 시급하다. 고의적, 집단적, 지속적 폭력은 소년법과 형법으로 처리해야 한다. 학교는 법 논리가 아닌 교육의 논리, 교육의 합목적성이 작동해야 하는 장소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대신 싸워주는 어른이 아니다. 그들만의 자치, 그들만의 전쟁, 그들만의 지옥과 천국의 존재를 인정하며 곁을 지켜주는 어른이 필요하다. 어린 시절 우리가 모두 그랬듯, 어른의 칭찬보다 친구의 인정과 미소와 소속감이 하루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시기가 있게 마련이다. 그 시기의 환희와 고통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천사도 악마도 아닌 세상의 무수한 '선'과 '지아'의 전쟁 끝에 필요한 건 그들만의 조용한 눈맞춤, 그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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