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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교육 현안 인터뷰 중에 이런 질문을 자주 받았다. “도대체 정부는 왜 그러는 걸까요?” 풀어쓰면 이런 식이다. “교육 당사자들이 우려를 표하는데 왜 교육부는 내년에 AI 디지털 교과서를 도입하려 할까요?”, “공간, 인력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왜 늘봄학교 도입을 서두를까요?”, “예산, 모델, 교육과정에 관한 논의 없이 왜 유보통합을 강행하려 할까요?”
현안마다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나는 공통 원인으로 정부의 강박을 꼽았다. 교육부가 단기간에 가시적 성과를 도출하려는 강박으로 교육 현장을 초토화해 온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인터뷰 시간이 더 길었거나, 내 생각을 적나라하게 밝힐 기회가 있었다면 이렇게 답했을 것 같다.
“사실 정부는 교육에 개뿔도 관심이 없습니다. 교육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아요. 2년 전에 대통령은 교육부를 경제부처와 동일시하는 발언을 했죠. 교육부의 첫 번째 임무를 산업 인재 양성으로 규정했습니다. 정부에게 교육은 정당정치와 선거용 도구이고, 학교는 산업 인력 양성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정부만 탓할 일인가요. 우리 사회 교육 담론은 대부분 교육이 아니라 입시 문제로 귀결되죠. 또 학교 교무실에서 하루 동안 전화를 받아보거나 교무회의에 참관해 보세요. 학교가 교육기관인지 민원 행정 기관인지 혼란스러울 겁니다. 솔직히 저는 현재 교육운동의 정체성도 모호하다고 봐요. 구호만 넘치고 교육 그 자체에 집중한 내용, 지향, 로드맵이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교육을 말하지만, 어디에도 교육이 없다는 것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최근 나는 ‘인권 친화적인 학교 만들기’란 주제의 작은 간담회에 참가했다. 훌륭한 패널들과의 의미 있는 대담이었지만 한편 가슴이 답답했다. 인권 친화적인 학교에 반대할 이유는 전혀 없다. 다만 교육자로서 나는 현재 공교육이 처한 난맥상을 인권 프레임으로 풀기 어렵다고 본다. 학생, 교사, 양육자가 각자의 권리만을 주장할 때의 참상을 매일 목격하고 있다. 인권뿐만이 아니다. 기후, 노동, 평화통일, 페미니즘 등 그 어떤 가치 있는 프레임도 공교육을 수렁에서 구출할 수 없다.
교육 그 자체의 의미를 향한 정면 도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쉽지 않다. 사회는 온갖 현안의 원인과 해결책을 교육에서 찾는다. 안전사고가 터지면 안전교육이 부족한 탓, 성 사안이 터지면 성교육이 부족한 탓, 폭력사태가 벌어지면 인성교육이 부족하다며 교육 현장을 흔든다.
아이들이 받는 교육은 미래 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아이들을 사회 발전과 개혁의 ‘도구’로 취급하란 뜻은 아니다. 현실 사회 문제의 해결과 변화의 책임은 엄연히 어른에게 있다. 권위주의를 타파한답시고 혹은 미래 사회에 대비한답시고 성인과 아이의 역할을 교란하는 것은 교묘한 책임회피다.
영국 사회학자 프랭크 푸레디는 ‘교육이 모든 것이 될 때 교육은 교육이기를 멈춘다.’라고 썼다. 전 세계적으로 교육은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적 도구로 인식된다. 그 결과는 교육 본연의 목표와 역할의 실종, 학생들의 기회와 잠재능력의 낭비다.
교육을 현실과 유리된 수도원으로 피신시키자는 의미가 아니다. 노동, 기후, 반전, 페미니즘 등 그 어떤 선의의 가치를 끌어모아도 부분의 합이 교육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교육의 독자적 목표와 역할을 찾아야 한다. 교육이 교육의 힘으로 서지 못할 때 교육은 정당정치의 ‘도구’, 사회 문제 해결의 ‘수단’, 기술 개혁 ‘실험실’의 신세를 면치 못한다.
2023년 교사들의 여름은 긴 전쟁의 시작이었다. 이제 교육자들에게 남겨진 길고 긴 전면전에 필요한 건 '구호'를 넘어선 '내용'이다. 전의를 불태웠던 자리에 남겨야 할 것은 학구열과 교육을 보는 장기적 관점이며, 분노와 슬픔보다 주요한 힘은 미래 세대를 향한 책임의식과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