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재건축에 대한 뉴스가 나올 때 종종 등장하는 단지를 처음 가봤다. 순수한 지인 방문 목적으로 간 것이다. 단지 내부로 들어서니 지금까지 가져왔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70년대 후반에 지어졌음을 증명하듯 아름드리나무들이 빽빽하게 도열해있었다. 단지 전체가 워낙 커서 나무 군단의 행렬이 끝이 보이지 않았다. 시각적으로 압도되기에 충분했다. 동간 거리도 넓었는데 오래 전 지어진 단지라 지금 같은 커뮤니티 시설이나 조형물 같은 게 없었다. 대신 온갖 나무와 풀, 잔디 등이 그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동간 거리가 더 넓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자연의 힘은 놀라워서 40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이들 조경수나 관목들은 아파트를 돋보이게 하는 부속물로 머무르지 않았다. 오히려 이미 조성된 숲에 아파트가 나중에 들어선 듯한 착각을 주었다.
단지에 녹지가 풍부해 좋다고 덕담을 건네자 지인이 답했다. “아침에 새소리에 깰 때가 많아요. 지저귀는 소리가 크고 경쾌해요. 어쩔 때는 자기들끼리 대화하는 것 같아요. 전혀 다른 울음소리들인데도 서로 답변을 주고 받는 것 같아요.”
그러고 보면 큰 나무가 많은 곳을 가면 유난히 새소리가 크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오늘 다녀온 양재 시민의 숲이나 어제 관악산 근처 산책로를 갈 때에도 그랬다. 집 근처 재건축을 기다리고 있는 옆 단지 마트를 갈 때에도 종종 새소리를 듣는다. 날개가 있어서 어디든 포르르 날아가 버리는 새. 한없이 자유로울 것 같으면서도 주변에서 보는 새들은 작고 가벼운 몸집 때문인지 다소 연약해보이기도 한다. 먹이를 구하거나 이동을 할 때, 위험을 피할 때마다 저 날개를 쉴 새 없이 움직일 것이다. 고단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앉아 쉴 수 있는 장소도 우리 손이 닿지 않는 높고 안전한 어느 곳일 테다.
오랜 수령을 지닌 도심의 나무들은 이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안온한 장소이다. 지상 가까이에서 풀벌레나 음식 찌꺼기 같은 먹이를 구할 수밖에 없는 도시의 새들에게 차량들, 사람들, 길고양이 (애묘인의 눈에는 한없이 귀여울지라도)는 모두 위협적이다. 훨훨 날아 장신의 나무 품에 안겨서야 지상의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 그제서야 작은 몸을 숨긴 뒤 긴장을 내려놓는다. 그 높이를 공유할 수 있는 이들이야말로 이들의 안전한 동료이다. 맘 놓고 시끄럽게 대화도 나눈다. 마치 점심시간 카페 직장인들의 경쾌함같다. 새들의 집도 그 높이의 어딘가 있을 것이다.
생태계를 구성해나가는 유기체 조합이 시간이 지나며 생명력이 충만해질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콘크리트 구조물은 그 사용기한을 다한다. 애초 단지가 조성된 목적을 환기하듯 재건축논의가 시작되고 부속물은 철저히 부속물의 처지로 돌아간다. 재건축 단지의 청사진으로 세대수도 더 늘리고 멋진 외관과 실용성 뛰어난 구조, 고급 인테리어에 대해 활기차게 논의되지만 부속물에 대한 고려는 없다. 수백그루의 아름드리나무들은 앞으로 한참 남아있을 긴 수명을 단념해야 한다. 장신의 나무들은 뿌리 채 뽑혀도 새 이식처를 찾지 못한다. 새들은 다시 어디론가 날아가야 한다. 고단한 날개를 쉴 곳을 찾아 부지런히 도심의 상공을 누벼야할 것이다. 야산의 돌을 깨고 사람들이 집을 짓고 굉음에 놀라 떠난 새들도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사람들은 새집이 중요했으므로 새 집은 다시 사라진다. 새들은 과거의 쓰린 기억을 반복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