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향, 나의 땅
1900년 대한제국은 내장원에 서북철도국을 설치해 서울과 의주를 잇는 경의선 및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을 직접 건설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임시군용철도감부를 설치하여 경의선을 군용철도로 건설했고, 1906년 4월 3일 용산역에서 신의주역까지 열차가 운행되었다. 경의선은 조선 시대 내내 이용되었던 의주로를 거의 그대로 따라가는 노선으로 서울에서 파주, 개성, 사리원에 닿고 다시 평양, 안주, 신의주에 닿는다. 한반도는 동쪽에 산맥이 위치하며 서쪽에 하천이 위치하는 동고서저 지형을 지녀, 경의선은 자연스레 국토의 서쪽에 치우쳐 건설되었고 도강이 편리한 지역 위에 다리들이 놓였다. 경의선의 종착지 신의주는 압록강 너머 남만주로 이어지는 도시였기 때문에,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운 일본은 만주국의 수도 신경(지금의 장춘)까지 철도를 놓고 경부선과 경의선을 이어 부산부터 신경까지 직통 왕복 열차를 운행했다.
그러다 해방 이후 북위 38도선 기준으로 남북이 나뉘면서 남측에선 서울역-개성역 구간만, 북측에선 사리원역-신의주역 구간만 주로 운행되었고, 한국 전쟁을 거친 다음엔 경의선은 거의 박살이 났다. 대한민국에서 실질적인 경의선의 종착역은 문산역으로, 그 북단은 선로가 단절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것이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경의선 선로 복구에 남북이 합의함에 따라 남한은 운천역과 임진강역, 도라산역을 세우고, 북한은 개성역-도라산역 구간에 단선 비전철 철도를 놓아 선로를 직결하게 되었다. 새롭게 남한 내 경의선 최북단역 및 북한 내 평부선 최남단역으로 건설된 도라산역은 남북 경계의 상징으로 거듭나, 동해선의 제진역과 더불어 남북출입사무소가 설치된 유이한 역이 되었다. 남북출입사무소는 국제공항처럼 세관, 검역, 출입관리 기능을 모두 갖추어, 세관 업무를 하는 외국인 단체관광객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장소가 바로 도라산역이다.
도라산역은 민간인 출입통제선 안에 위치해 있으므로 방문하려면 사전에 출입 신청을 하여 허가를 득해야 하며, 방문 시 신분증을 꼭 휴대해야 하고, 허가된 지역에서만 사진 촬영이 가능하다. 즉 도라산역 직전 역인 임진강역에 모든 관광객이 하차하여 출입 허가 절차를 거치고, 그게 끝나야 도라산역까지 운행하는 열차에 다시 승차할 수 있다. 조금 더 자세히 절차를 알아보면, 먼저 임진강역 내 출입신청부스에서 신분증과 승차권을 보이고 주민등록번호를 기재한 뒤 연계관광 신청부스에서 도라산역까지 가는 특별열차를 기다린다. 그러다 관광신청 비용을 지불하고(성인 1인 기준 8,700원) 입장권과 목걸이 비표를 받은 뒤 특별열차에 승차하는 것이다. 이처럼 임진강역과 도라산역 구간은 지정된 열차로만 출입해야 하며, 출입하고 나가는 인원이 일치해야 한다. 현재 도라산역 방문은 120명, 연계관광은 180명으로 1회 300명까지로만 출입 인원을 제한한다.
만약 도라산역을 열차가 아닌 관광버스로 방문하게 된다면, 민통선 경계 구역의 검문소에 버스가 일단 멈춘다. 그리고 검문을 맡은 군인이 버스에 탑승하여 승객의 신원과 방문 신청된 이들의 정보를 비교 검사한 뒤 버스를 통과시킨다. 기본적으로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는 구역의 경계가 민통선이지만 이처럼 안보관광과 연관된 장소들은 해당 지자체와 관할 군부대가 대민홍보를 위해 마련한 시설들이 위치해 있으므로 출입이 상당히 완화된 편이다. 자연적 경계를 형성하는 한강 하구와 서해를 끼고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강화군이나 김포시의 경우 승용차에 앉아서 신분 확인에 응하기만 하면 통과시켜줄 정도로 검문도 간단하고 24시간 자유통행이 가능한 국도나 버스 노선이 존재하기도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출입이 완화되어 있다고 해서 마음대로 군사 시설에 들어가거나 군사 지역을 촬영한다거나 하는 행위는 금지된다.
도라산역이란 역 이름의 유래는 역 근방의 해발 156m 야트막한 산의 이름이 도라산인 데에서 왔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였을 때 이 산에 올라 신라의 도읍인 서라벌(경주)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고 이러한 연유로 산 이름이 도라(都羅: 신라의 도읍)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망국의 한을 품었던 이의 사연이 깃든 산이, 먼 훗날 분단의 현실을 잘 나타내는 산으로도 변신할 거라고 어느 누가 예상했을까. 한창 대북 관계가 좋았을 무렵의 도라산역은 새마을호 열차, 통근열차, DMZ 관광열차 등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지만 대북 관계 악화, 관광열차 노후 등의 사유로 지금은 거의 인적이 끊기다시피 한 상태이다. 때문에 역이라기보단 곳곳에 통일을 염원하는 예술품이나 정치인들의 흔적이 남겨진 널찍한 전시관에 가깝다. 도라산 주변의 지뢰밭을 지나 언덕길을 오르면 북한 땅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도라전망대가 있다. 1987년 1월 민간에 공개된 서부전선 최북단의 전망대로서, 날씨가 좋은 날에는 개성공단과 북한의 선전용 마을인 기정동, 김일성 동상, 송악산 등을 볼 수 있다. 단, 상기했듯 주변이 지뢰밭이므로 눈이나 비가 심하게 오는 날에는 방문객 및 운전사의 안전을 위하여 전망대 출입을 제한한다.
전망대 근방에는 그 유명한 제3땅굴이 있다. 북한은 한국 전쟁 이후에도 남침을 위해 무수히 땅굴을 파두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순서대로 번호를 매겨 제3땅굴은 말하자면 세 번째로 발견된 땅굴이라고 할 수 있다. 제3땅굴이 세간에 이름난 까닭은 방문객도 가장 많지만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땅굴이어서이다. 여기서 문산까지는 12km, 서울까지는 52km로서 만약 이 땅굴이 발견되지 않은 채로 공사가 계속 진행되어 북한의 병력이 땅굴을 통해 서울에 느닷없이 밀려들어 왔다거나 했다면 끔찍한 상황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제3땅굴 전시관에서는 땅굴의 발견 경위를 대략적으로 설명해준다. 북한에서 남침용 땅굴 측량기사로 일했던 김부성 씨가 1974년 귀순하여 판문점 근처에 땅굴이 있다고 제보하였고, 1978년에 이르러서야 판문점 남쪽 4km 지점에서 현재의 제3땅굴이 나타난 것이다. 땅굴의 폭과 높이는 대략 2m, 깊이는 73m, 총 길이는 1,635m로서 1시간에 최대 3만 명의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는 규모라고 한다. 북한은 제3땅굴의 발견 이후 남한이 판 땅굴이라는 주장을 폈다고 하나, 국제 사회에서 이러한 주장을 믿는 나라도 없었거니와 실제로 제3땅굴에 가보면 북쪽에서부터 남쪽을 향하여 뚫어나간 자국이 굴 벽면에 몹시도 선명하게 보인다.
그럼 이제부터 머리를 다치지 않도록 헬멧을 쓰고 저 아래 컴컴하고 축축한 제3땅굴에 같이 들어가보도록 하자. 상당히 경사가 있으므로 조심해서 걸어 내려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