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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rux Mar 29. 2024

이 곳은 한때

세계 속의 대한민국

 동두천과 소요산, 한탄강은 승용차로 이동했을 때 끝에서 끝까지 20분 가량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라, 말 그대로 옆 동네다. 서울시청에서 강남구청 가는 것보다도 더 빨리 도착하는 셈이니, 동두천 사람들에겐 한탄강 구경은 색다를 것도 없는 동네 산책이나 다름없을 지경일 터다. 한탄강은 임진강의 지류로서, 크다는 의미의 순우리말 한, 여울 탄(灘)이 합쳐져 ‘큰 여울’이란 뜻의 이름을 지녔다. 공교롭게도 이 이름이 원통하여 내뱉는 탄식이란 의미의 한탄(恨歎)과 음이 같아 온갖 이야기가 떠돈다. 근방 철원에 수도를 정하여 태봉이란 나라를 세웠던 궁예가 실각하고 쫓기면서 이 강에 ‘한탄’을 했다는 이야기, 한국 전쟁 당시 수많은 사상자가 났던 강이라 민족의 비극을 ‘한탄’한다는 이야기 등이 그 실례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실제 강 이름의 유래도 아닐 뿐더러, 정작 강 일대는 대표적인 화산암 지형으로 국가지질공원 및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되었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헌데 동두천과 한탄강이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사실은 아주 기묘하고도 충격적인 사건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사건은 1978년 1월의 어느 날, 한탄강변에서 ‘이상한 돌’이 발견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동두천에서 주한미군 공군 상병으로 근무하던 그렉 보웬은 군부대의 가수였던 한국인 여자친구와 한탄강에서 산책을 하다가, 커피를 마시려고 코펠에 물을 끓이려 강변에서 돌을 모았다. 그러다 그렉은 여자친구가 주워 온 돌이 어딘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그는 실은 애리조나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였으며, 학비를 벌기 위해 주한미군으로 근무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렉은 돌들을 챙겨와 프랑스의 고고학 교수에게 보냈다. 프랑스 교수는 다시 김원용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교수에게 정밀 조사를 의뢰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김원용 교수의 연구팀은 돌들이 구석기 시대의 유물인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라는 걸 밝혀내게 되었다.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런 기적같은 일이 또 있을까.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는 대칭형 뗀석기로서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고, 동아시아에서는 이보다 이전 시대의 조악한 올도완 석기만이 출토되고 있었다. 따라서 1978년 이전까지 모비우스 등으로 대표되는 학자들은 찍개, 거친 자갈 등으로 만든 올도완 석기가 나오는 동아시아에 인류가 먼저 거주하였고 아프리카에는 그 이후에 인류가 진입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한다. 그런데 동아시아 끄트머리에 위치한 대한민국에서 떡하니 몇십 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아슐리안형 석기가 나와 버리니 고고학계는 완전히 뒤집힌 것이다. 이후 세계적 석학을 비롯한 다양한 연구자들이 그렉이 거닐었던 한탄강변의 연천 전곡리를 방문하였으며 총 17차례의 발굴 조사를 통해 약 8,500여 점의 구석기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를 계기로 중국과 유럽에서도 연이어 아슐리안형 석기가 발견되었고, 결국 정설로 받아들여지던 모비우스의 학설은 폐기되기에 이른다.


 당연히 전곡리 유적의 발견자인 그렉 보웬은 세계 고고학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그는 제대 후 본인의 출신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으며 나바호 인디언 역사보존부에 근무했다고 한다. 2005년에 그는 연천 구석기 축제에 초청받아 방한하기도 하였으며, 방한 당시 한국인들로부터 ‘당신이 아니었으면 전곡리의 역사는 지금도 잠들어있을 것’, ‘유적지 이름을 보웬 유적지라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탄강변의 외진 농경 지대에 불과하던 연천은 전곡리 덕분에 구석기를 주제로 하여 다채로운 지역 행사와 사업을 벌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주먹도끼가 발견된 유적지는 사적 제268호로 지정되었고, 국내 유일의 화석인골모형을 전시한 전곡선사박물관이 건립되었으며, 상기한 축제는 한창일 때 한 해에만 95만 명이 다녀가는 거대한 축제로 성장하였다.


 어쩐 일인지 한탄강은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일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얻게 되었다. 한국 전쟁 이후 육군 중위로 복무하다 예편한 경험이 있던 고려대 이호왕 교수는 전쟁 당시 UN군을, 그 중에서도 미군을 몹시도 고통에 빠뜨렸던 괴질을 연구할 기회를 얻는다. 괴질이 발생하고 2년 후쯤 UN군 장병 약 3,200여 명이 감염되었으며, 괴질 탓에 중공군이 한강 이남으로 섣불리 넘어오지 못할 만큼 중증과 사망으로 이어지는 군인들의 숫자가 상당했다. 환자들은 하나같이 5일 안팎의 급격한 고열, 발적, 신장 및 간장 기능 장애를 나타냈으며, 그 가운데서도 특징적이었던 건 전신성의 출혈 경향을 보인다는 거였다. 오죽하면 UN군과 중공군은 731부대를 들먹이며 상대방이 세균전을 벌였다고 서로를 비방할 지경에 이르렀다. 예상치 못했던 문제는 한국 전쟁에 파견되었던 군인들의 귀환 이후 이 괴질이 세계 곳곳, 유독 미국 본토에서 걸핏하면 발생한다는 거였다. 기온이 떨어지는 늦가을부터 괴질은 맹위를 떨쳤고 산이나 풀밭에 야외 활동을 갔던 이들은 속속 쓰러졌다.


한국 전쟁에 종군했던 군인들은 곧 전세계에 괴질을 퍼뜨리게 된다.

 미국은 괴질이 발견된 1952년부터 15년 간 괴질의 정체를 찾으려 애썼으나 병원체를 찾는 데 실패하여 연구를 포기하였다. 대신 미 육군이 이호왕 교수팀의 연구에 지원비를 댄다. 괴질 유행 지역을 뒤지며 병원체 찾기에 몰두하던 연구원들은 감염의 매개체로 추정되는 쥐를 잡다 간첩으로 몰리기도 하고, 괴질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 1975년 10월, 이호왕 교수팀은 한탄강 인근에서 야생하는 등줄쥐의 폐 조직에서 괴질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세계 최초로 분리해냈다. 해당 바이러스종은 한탄 바이러스라고 명명되었으며, 교수팀은 경미한 증상과 치사율을 보이는 서울 바이러스도 발견해냈고 연구실은 세계보건기구의 연구협력센터로 지정되었다. 한탄 바이러스는 등줄쥐에 의해 옮겨지며 중증 쇼크와 신부전을 유발하는 반면, 땃쥐, 집쥐, 실험용 흰쥐 등에 의해 옮겨지는 서울 바이러스는 무증상이거나 1~2%의 치명율을 보인다고 한다. 이후 대한민국 GC녹십자에서 세계 최초로 한탄 바이러스 백신 ‘한타박스’를 개발하여 현재까지도 전방 근무 군인과 거주 주민들은 이 백신을 맞는다. 아울러 괴질은 유행성 출혈열, 이후 외국의 유사한 병증까지 묶어 신증후군 출혈열로 불리게 되었다.


 이제는 주먹도끼를 발견했던 그렉 보웬도, 한탄 바이러스를 발견했던 이호왕 교수도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이 남긴 유산은 아직도 건재하다. 이 모든 일련의 상황들을 지켜보았던 한탄강도 유유히 흐르고 있다. 한때 세계인의 이목을 대한민국에 집중시켜 주었던 이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종류의 감사함을 느끼며, 슬슬 다음 여행지로 향하는 발걸음을 떼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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