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꼭
철마는 달리고 싶다. 철로가 끊긴 백마고지역에는 아직도 이 문구가 버젓이 붙어 있다. 백마고지역의 철로는 북으로만 끊긴 게 아니라 남으로도 끊겼다. 2014년 4월부터 모든 동두천발 통근열차의 종점으로 활약했던 백마고지역은, 2024년 현재 말 그대로 사람의 흔적조차 없는 빈 역이 되어 있다. 수도권 1호선 전철의 종점이 연천역까지 연장되면서, 동두천~연천 복선전철 사업의 예산 절감과 공정 단축을 위해 한국철도공사에서는 소요산~백마고지역 열차의 운행을 일시 중지하였다. 그러나 복선전철이 개통된 이후 지금까지도 백마고지역에는 열차가 다니지 않으며, 대체 운송수단으로 버스가 다닐 뿐이다. 한때 ‘남한에서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올 수 있는 최북단의 철도역이자 강원도 최서단의 철도역’으로 불렸지만, 열차도 다니지 않는 이상 철도역으로서의 기능은 실질적으로 상실한 상태라고 보는 게 맞겠다. 역사는 열려 있지만, 승강장 출입은 제한되어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파주에서도, 철원에서도 DMZ 여행을 열차로 하기란 쉽지 않다.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그저 버스나 승용차를 이용해야 한다.
복선전철이 착공되기 이전, 동두천을 출발한 기차는 소요산, 폐역이 된 초성리역과 한탄강역을 거쳐 전곡역으로 들어갔다. 초성리역과 한탄강역 사이에 38선과 한탄강이 지나가므로 경원선에서 해당 구간의 차창 밖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고 꼽혔으며, 한탄강역 바로 옆에 한탄강유원지와 전곡리 선사 유적지가 존재하는 등 관광 자원은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역으로 들어오는 길목의 초성철교가 홍수로 붕괴되었던 전적도 있고 이용 실적이 워낙 적기도 하여(2018년 일평균 이용객 1명) 결국 복선전철 착공과 함께 2023년 11월 21일 초성리역과 한탄강역은 최종 폐역 처리되었다. 다만 두 역의 중간 지점 즈음에 청산역이라는 새 1호선 역이 들어섰다.
확률이 희박하지만, 만약 백마고지역이 다시 부활한다면 전곡리 선사 유적지에서 전곡역으로 걸어가 연천, 신망리, 대광리, 신탄리를 거쳐 백마고지역에 기차로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남북철도복원사업으로 재건 추진 중인 철원역까지 닿을지도 모른다. 철원역 터는 일제강점기 시절 춘천에 버금갈 정도로 번성하던 시가지였으며, 철원역이 금강산선의 분기점이어서 조차장, 사무실, 전기 시설, 여관이 인근에 밀집했었다. 도로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시절, 서울이나 평양 사람들은 동해안에 놀러 간다고 하면 으레 경원선과 금강산선을 타고 원산이나 금강산에 가는 걸로 여겼다고 한다. 한국 전쟁으로 철원역의 승강장은 없어졌고 급수탑은 폭파되었으며, 선로와 철원 시가지도 흔적만 남고 사라진 데다가 해당 지역이 민통선 북쪽에 위치하여 지금은 거의 버려진 상태다. 전쟁 이후 철원읍이 다시 생겼다곤 하지만 동송읍 옆에 이사를 온 것에 가깝고, 여기서 과거 철도 교통의 중심지로 번화하던 모습을 찾아보기란 어렵다.
따라서 어차피 철도로 여행을 하지 못할 바에, 철원 권역 DMZ는 조금 돌아가더라도 고석정을 거쳐 둘러보는 게 더 나은 선택이다. 전곡리 선사 유적지에서 고석정 국민관광지를 향해 가다 보면 새파란 물빛이 인상적인 비둘기낭 폭포와 한탄강 세계지질공원센터가 나온다. 2015년 환경부장관이 인증한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다가, 2020년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지질공원이 된 곳이 바로 한탄강 주변이다. 마찬가지로 신생대 제4기 무렵의 화산분출물로 형성된 세계지질공원인 제주도가 바다를 끼고 있다면 여기는 강을 끼고 있다는 게 특징이며, 주상절리와 기암괴석이 강줄기 양편에 펼쳐져 있어 멋진 풍경을 자랑한다. 풍경이 아름다우면 정자를 짓는 것이 당연지사. 고석정은 610년 신라 진평왕이 10평 규모로 세웠다는 2층 누각의 이름이며, 이후 1560년 조선 명종 때는 의적 임꺽정이 정자 건너편에 석성을 쌓고 웅거하였다고 한다. 강 한가운데 10m 높이의 고석(孤石)이라는 바위가 놓여 있고 일대에 현무암 계곡이 들어서 있어 경치가 독특하다. 이를 즐기기 위한 유람선 선착장이 고석정에 있어 사시사철 인파가 몰리며, 꽃이 피는 계절에는 주차할 공간을 찾을 수가 없을 만큼 북적여 과연 국민관광지란 명칭에 어울리는 장소다.
고석정이 인파로 붐비는 반면 조금 떨어져 있는 삼부연폭포는 같은 철원 9경이라도 대체로 한산하여 주차하기에 나쁘지 않다. 삼부연(三釜淵)이란 명칭은 가마솥과 같이 생긴 물 떨어지는 연못이 세 개 있다는 뜻이다. 후삼국시대 궁예가 태봉국을 세우고 도읍을 철원에 정할 무렵, 삼부연에서 도를 닦던 이무기 네 마리 가운데 세 마리만 용이 되어 승천하고 한 마리만 남았다고 한다. 용들이 승천하면서 생긴 큰 구멍 세 개에 물이 고여 연못이 되었고, 인근 마을도 용화동(龍華洞)으로 불렸으며,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는 매년 심술을 부려 가뭄을 들게 하므로 이후 여기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삼부연폭포의 아름다움은 그 옛날에도 유명했었던지,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겸재 정선의 <해악전신첩>에 ‘삼부연도’란 그림이 존재한다. 물줄기가 세 방향으로 꺾여 내려오는 삼부연폭포의 특징을 그림 속에 잘 표현하고 있다. 폭포가 명성산 중턱의 화강암 지대에 위치해 있는데, 지표에 드러난 화강암이 오랜 세월 동안 침식되어 만들어진 폭포인지라 어쩐지 조선 초 정선이 삼부연도를 그릴 때보다 현재의 폭포는 물줄기가 약간씩 뒤로 더 물러난 느낌이다.
폭포의 장쾌한 모습을 눈에 담은 채 북쪽을 향해 달리다 보면 채 30분이 되지 않아 DMZ 두루미평화타운에 닿는다. 폐교된 양지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하여 2016년 개관한 곳으로서, 철원 두루미 서식지 보전을 위한 장소이자 철원 DMZ 평화여행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1일 4회, 회당 차량 50대, 인원 300명 제한이 걸린 투어 프로그램이라, 조기 마감되기 전에 서두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