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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rux Apr 19. 2024

발해를 꿈꾸며

옛 영화는 어디로 가고

 진정 나에겐 단 한 가지

 내가 소망하는 게 있어

 갈려진 땅의 친구들을

 언제쯤 볼 수가 있을까

 망설일 시간에 우리를 잃어요     

- 서태지와 아이들, ‘발해를 꿈꾸며’ 


 1992년, 가요계에 혜성처럼 나타났던 아이돌 그룹이 있었다. 현재까지도 K-pop의 뿌리이자 ‘문화 대통령’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서태지와 아이들은 데뷔 앨범인 1집부터 방송사의 가요 순위 프로그램을 모두 석권하는 기염을 토한다. 그러다 2집에는 힙합에 국악을 접목시키더니, 3집에는 통일, 교육 현실, 마약 문제 등의 사회적 이슈들을 대거 투입시켰다. 3집에 수록된 ‘발해를 꿈꾸며’는 고등학교 7차 교육과정의 ‘음악과 생활’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한 곡인데, 통일을 염원하는 가사에 맞추어 뮤직비디오가 제작되었고 그 뮤직비디오의 배경이 된 장소는 바로 철원의 노동당사이다. 총탄과 포탄을 맞은 콘크리트 벽체에 화려한 조명들을 쏘아대고, 대형 태극기를 전면에 걸고, 입구 위에서 여럿이 군무를 펼치는 뮤직비디오의 장면을 보고 있자면 어쩌다가 문화재청이 촬영 허가를 내주었나 하는 의문이 불쑥 솟는다. 드라마 킹덤에 무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창덕궁 후원이 배경으로 등장했을 때에도 비슷한 맥락으로 깜짝 놀랐다. (물론 좀비들 탓에 무서워서 놀란 것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여러 차례 노동당사 보수 공사를 진행했으나 그건 붕괴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을 뿐 여태까지 근본적인 보수는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곧 붕괴할 거라는 경고가 최근 제기되었고, 일반인의 출입을 막고 외관 관람만 허용하다가 2023년 3월에 전면 보수공사가 시작되었다. 뮤직비디오를 촬영할 당시 별 문제가 없었던 게 천행이라 생각될 만큼, 노동당사 건물은 위태롭기 짝이 없다. 1946년 철근도 없이 벽돌과 콘크리트만으로 지은 건물인데다 남북한 양측 군대의 격전으로 내구성이 떨어져 부식이 심하며, 건물 뒷편에는 무너진 곳이 너무 많아 보강 지지대가 설치되었다. 또한 2층은 바닥이 내려앉아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3층 역시 옥상 부분과 바닥이 일부 소실되어서 형태를 알아볼 수가 없다. 다만 2002년 문화재청 공인 등록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기 전까지는 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웠어서 그런지 내벽은 한국어, 한문, 영어 등 온갖 낙서로 뒤덮여 있다.


여러분 내려오세요. 건물이 곧 무너질 지도 몰라요. 사진 출처: <발해를 꿈꾸며> MV

 노동당사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본 건물은 원래 북한 조선로동당의 것이었다. 김일성 등이 1945년 10월 10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란 명칭으로 창당한 이후, 1949년 조선로동당으로 당명을 개칭하여 북한 유일의 집권당으로 군림하게 된다. 노동당사는 철원 및 인근 지역을 관할하는 조선로동당 철원군지부 건물로 사용되다 한국 전쟁 당시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휴전 이후 육군이 건물 뒤편의 방공호를 조사한 결과 조선로동당 당국에 의해 고문사를 당했던 사람들의 유골과 두개골, 고문 도구와 시설 등이 발견되었다. 노동당사와 내무서(경찰서)에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들과 반공 인사들 약 300여 명은 육군에게 쫓기던 인민군들에 의해 인근 수도국 급수탑에서 총살되거나 저수고에 생매장당했다고 한다. 3층은 당 사무실, 2층은 고문실이나 조사실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제대로 된 사진 하나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하진 않다. 당시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도 걸렸었고, 인공기와 조선로동당기가 깃대에 게양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지금은 깃대마저 소실되었다. 각 층 내벽은 상부는 흰색, 하부는 붉은색으로 도색되어 있으며, 건물 뒤에는 방공호가 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동시에 38선 이북에 있던 철원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였고 인민위원회가 설치되어 공산정권 아래 놓였다. 철원읍 시가지 한복판에 건립된 조선로동당 철원군지부는 북한이 공산 독재 정권 강화와 주민 통제를 목적으로 건립한 소련식 건물로서, 당원들은 북한 중앙 정부로부터 내려오는 극비 사업, 지역 동향 사찰, 대남공작 등을 담당하였다. 당시 성금이란 명목으로 주민들로부터 쌀과 인력, 장비를 착취하는 한편 건물 내부는 보안 유지와 기밀 누설 방지를 위하여 출입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철원과 같이 한국 전쟁 전에는 북한 땅이었다가 이후 남한에 편입된 지역을 수복 지구라고 하는데, 수복 지구는 다른 지역보다 이데올로기 대립이 더욱 극심하여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북한은 철원에 있던 강원도청을 1946년 원산으로 옮김과 동시에 남침 준비를 위한 병력 및 물자 집적기지로 철원, 김화, 평강 세 군을 활용하기 시작하였고, 세 군은 ‘철의 삼각지대’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하필 지리적으로 세 군이 남한으로 통하는 평야 지대였던 탓에, 한국 전쟁 내내 북한군과 UN군은 빼앗고 빼앗기는 혈투를 여기서 벌였던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철의 삼각지대는 거의 초토화되어 현재로선 구경할 만한 것들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 무거워진 마음을 조금 가벼이 하기 위해, 다음 목적지인 도피안사로 향해본다. 이제부터는 굽이굽이 국도를 돌아 종착지인 고성 권역 DMZ까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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