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은 다만 고요할 뿐
1988년 9월 17일,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그리고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하계올림픽이 개최되었다. 제24회 서울 올림픽 경기대회는 ‘화합과 전진’을 슬로건으로 내세워, 냉전 종식 및 남한의 도약을 알리는 밑거름이 된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대회였다. 당시에 나는 꼬마였으므로 아쉽게도 올림픽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지만, 신기하게도 주제가였던 코리아나의 ‘손에 손 잡고’는 매일처럼 어디서나 나와서 그런지 기억이 나고, 당시에 대통령이 노태우였던 것도 기억이 난다. 즉 내 인생 최초로 대통령이란 존재로서 각인된 이는 노태우다. 헌데 올림픽이 있던 그해 날이 추워지자, 예전에 대통령이었다는 안경 쓰고 머리 벗겨진 사람이 백담사에 들어간다는 소식이 연일 TV를 장식했다.
나중에야 알았다. 11월 2일부터 제5공화국 청문회가 열렸었고, 그 청문회는 제5공화국의 비리와 5.18 민주화운동 진상조사를 위한 헌정 사상 최초의 청문회였다는 것을. 전두환은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재산을 사회에 반환하겠다는 인터뷰를 남긴 채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에 들어가 2년 1개월여 간 칩거하였다. 청문회는 5공 시절 은폐되었던 전두환의 전횡을 낱낱이 파헤쳐 단죄하는 게 목표였으나, 현직 대통령이었던 노태우 역시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주도했던 제5공화국 실세였기에 전두환을 구속시키지는 않고 그의 일가친척들만 구속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말하자면 감옥에 가야 하는 걸 겨우 면하여 숨어지낼 수 있게 해준 셈인데, 하필 도피 장소로 백담사가 낙점된 것이다.
처음에 노태우가 전두환에게 은신처로 권유한 곳은 전두환의 고향인 합천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합천의 해인사는 유명한 고찰이라 참배객이 많아서, ‘속죄’하고 있다는 연출이 어려워 해인사 대신 인적이 뜸하고, 독립운동가가 머물렀던 전적이 있으며, 출입구가 하나 뿐인 폐쇄적인 구조의 백담사가 은신처로 결정되었다는 거다. 실제로 전두환이 머물었던 시절 백담사엔 사복경찰과 전의경이 24시간 그를 경호하며 난입하는 기자를 막았고, 전두환 본인은 백담사 옆에 비닐하우스를 지어 관광객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고 사진을 같이 찍어주기도 하며 이미지 쇄신을 위한 노력을 했다고 한다. 지하에 계신 한용운 선생이 통탄할 일이지만, 전두환은 한용운이 머물렀다던 만해당과 화엄실에 본인의 옷과 사진 등을 놓고 본인이 다녀갔다는 문구를 남기는 등 온통 자신의 흔적을 남겨놓았다. 공교롭게도 한용운의 호가 만해(萬海)인데 전두환의 호가 일해(日海)라 엇비슷해서 본인과 한용운을 동일시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역사의 소용돌이에 놓여 한동안 언론의 주목을 받았었던 장소지만, 원체 그랬듯 유명세가 사라진 현재의 백담사는 예전과 같이 다시 호젓한 분위기일 뿐이다. 특히 자연보호를 위해 자가용 출입을 금지하고 있어, 백담사에 가려면 입구의 백담마을에 있는 관광안내센터에 주차를 하고 셔틀버스를 타거나 약 2시간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걸어가는 길이 멀고 험해 배차간격이 좀 길더라도 대부분 셔틀버스를 타는데, 버스가 다니는 길조차 외길인데다 한쪽이 낭떠러지라 맞은편에서 차가 오면 꽤 아찔한 장면이 연출된다. 그렇게 굽이굽이 10~15분 가량을 올라가면 소박한 절간이 눈에 들어온다. 백담사는 여러 차례 불이 났다가 복구되기를 반복하였고 8번째로 한국 전쟁 때 멸실된 것을 1957년에 재건한 사찰인지라 건물 자체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다시 세울 적마다 이름도 바꾼 탓에, 백담사란 이름은 11번째 이름이라 한다. 조선 후기 정조 7년(1783) 주지승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서 ‘대청봉에서 절 터까지 웅덩이가 몇 개나 되는지 세어보라’고 했다 한다. 날이 밝고 주지승이 물 웅덩이 수를 세어보았더니 꼭 100개였으므로 절 이름을 백담사(百潭寺)라고 고쳤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다른 지역보다 유독 인제의 겨울은 뼈가 시리도록 추우므로 보통 이곳을 방문하기 가장 좋은 시기는 단풍철로 본다. 추위가 빨리 찾아오고 늦게 떠나는 동네이니, 단풍이 빨리 찾아오는 것 역시 당연지사다. 아름다운 가을볕 아래 붉게 물든 만해마을과 백담사를 둘러보는 건 참 운치 있는 일이지만, 오히려 혹독한 겨울을 즐기러 인제를 찾는 이들도 있다. 꽝꽝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빙어를 잡거나, 덕장에서 그득한 눈을 이고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는 황태를 맛보는 건 춥더라도 겨울이 제격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지구온난화로 인해 한반도의 평균 기온이 조금씩 상승하고 있다곤 하지만, 겨울에 인제를 방문하면 기온 상승은 도대체 어느 지역 이야기인가 싶을만큼 칼바람이 쌩쌩 분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눈이 시릴 듯 새파란 하늘과 대비되는 새하얀 자작나무 숲을 보러 오는 겨울 관광객들이 많은 듯하다. 원대리 자작나무숲은 주차장에서부터 근 1시간을 걸어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데, 빙판길이 제법 미끄러워 입구에서 판매하는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은 이들은 나중에 후회하기 십상이다. 글을 쓰는 지금도 숲길을 걸어 올라갈 때 얼어붙어 감각이 거의 없던 내 발가락이 떠오른다. 당시 인제의 기온은 영하 17도였다.
인제를 떠나 고성으로 가려면 진부령을 거쳐가야 한다. 앞선 글에서 언급했듯 인제는 영동과 영서를 가르는 태백산맥을 품고 있어 고개가 많다. 미시령을 지나면 속초, 한계령을 지나면 양양, 곰배령을 지나면 정선. 미시령은 이제 터널이 뚫려 쭉 직진하다보면 금세 울산바위가 눈에 들어오지만, 다른 고개들은 아직도 이전처럼 꼬불꼬불한 산길을 돌아돌아 가야 한다. 진부령 정상에서 한숨 돌리면서 백두대간 표지석도 보고, 휴게소에서 음료 한 잔 마시고 나선 내려가는 길이다. 이제부터는 고성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