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지 못함과 같다
진부령에서 자동차를 타고 도로를 따라 30여 분을 내려오면 금세 고성군청에 닿고, 푸르른 동해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고성에 방문했을 적에 약간 의아했던 건, 왜 도로교통표지판에 ‘고성’이라고 그대로 군 이름이 적혀 있지 않고 ‘고성(간성)’ 이렇게 적혀 있는가란 점이었다. 현재 행정구역 상 군 이름은 분명 고성이고, 간성은 고성군 안에 있는 여러 개의 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고성 전역은 38선 이북에 위치하여 해방 직후 북한의 영토였는데, 한국 전쟁 이후 남한이 금강산 남쪽까지 영토를 넓힘에 따라 간성군으로 분류되던 지역 전역과 옛 고성읍 일부가 남한의 차지가 되었다. 이에 북한은 전쟁 이후 고성군의 군청을 장전읍으로 옮겼고, 남한에서는 간성군을 없애 고성군 안에 면으로 편입시켜 지금에 이르렀다. 하지만 엄연히 남한의 고성 권역은 대부분 과거 간성군이었고, 이에 따라 고성군청 옆의 시장도, 학교도, 터미널 이름에도 간성이란 이름이 붙어 있는 재미난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하긴 공교롭게도 경상남도에 발음이 같은 고성군이 또 있으니, ‘고성(간성)’으로 표시하면 구별하기도 쉬울 것 같다. 만약 처음부터 지명을 한자로 표기했었다면 혼동할 일 자체가 없었을 지도 모르지만 말이다(강원특별자치도의 고성군은 한자로 고성(高城)이라 표기하지만, 경상남도의 고성군은 고성(固城)이라 표기한다.).
군청에서 조금만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고성의 상징과도 같은 화진포가 등장한다. 동해안은 높은 산맥에서부터 고도가 바다로까지 급격하게 낮아지는 특징이 있고 조수 간만의 차가 크지 않아, 모래가 바닷가에 방파제처럼 쌓이고 쌓여 만들어낸 호수가 많다. 이런 호수를 석호(潟湖)라 하는데, 자연적으로 석호는 해수욕장 및 바다와 함께 존재하는 까닭에 풍경이 아름답다. 강릉의 상징과도 같은 석호가 경포호라면 속초에는 청초호와 영랑호가 있으며, 고성에는 송지호, 화진포가 있다. 그 중 화진포는 강원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0호에 1971년 12월 16일 지정되었으며 둘레가 15km를 넘는 국내 최대의 석호다.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 살던 이화진이라는 사람은 성질이 고약하여 시주를 받으러 온 스님에게 식재료 대신 소똥을 한가득 들려보내 골탕을 먹였다. 스님이 복 받으십시오 하며 그냥 건봉사에 돌아가니, 마음씨 착한 며느리가 쌀을 가지고 시주를 하러 스님을 따라가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스님은 며느리더러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했고, 잠시 후 하늘이 무너질 듯 쾅 하는 소리가 뒤쪽에서 났다. 저도 모르게 며느리가 뒤를 돌아보았는데, 이화진의 집과 논밭이 파괴되어 커다란 구덩이처럼 패였고 구덩이는 쏟아진 폭우로 곧 호수처럼 변해버렸다. 스님은 이미 모습을 감추었으며, 며느리는 애통해하다가 그만 돌이 되어 버렸다. 이에 그때 생긴 호수를 화진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앞서 기술했듯 화진포는 이전에 북한의 영토였던데다 경치가 좋아 휴양 목적의 건물들이 호숫가에 지어졌는데, 김일성의 별장이었던 ‘화진포의 성’과 초입의 화진포 생태박물관, 인근의 이기붕 별장 및 이승만 별장은 통합관람권으로 들어가볼 수 있다. 본래 화진포의 성은 일제강점기 말 셔우드 홀의 의뢰로 독일인 건축가 베버가 설계하여 1938년 교회 예배당과 별장으로 지은 지상 2층, 지하 2층의 석조 건물이었다. 셔우드 홀은 1893년 서울에서 태어난 캐나다인으로서 선교사이자 결핵을 전공한 의사이기도 하여, 결핵 퇴치를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1932년 우리나라에 크리스마스 씰을 도입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1941년 한국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일제에 의해 셔우드 홀이 국외 추방된 이후로 건물은 비어 있었으며, 1945년 해방이 되고 1948년 김일성이 자신의 휴양지를 화진포에 마련하게 되면서 김일성 별장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김일성의 뒤를 이어 북한의 2대 통치자가 되었던 김정일도 어린 시절 이곳에 들러 휴양을 즐기고 기념사진까지 촬영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국 전쟁 당시 훼손된 것을 1964년 대한민국 육군이 재건축하여 육군 사병 및 간부들의 휴양지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다 2005년 옛 모습으로 복원하여 전시 공간으로 일반인에 개방했다. 현재는 한국 전쟁의 실상과 북한군의 만행 등에 대한 기록물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3층의 옥상 전망대에서는 육안과 망원경으로 화진포 앞바다 전경을 볼 수 있다.
산 중턱 즈음 우뚝 솟은 화진포의 성과 달리 이기붕 별장은 인근 평지 소나무숲 안에 단층 건물로 지어져 있다. 이 건물 또한 1920년대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건축되었던 것이며, 이승만 별장 터도 외국인 선교사가 머물렀던 장소라고 한다. 원래 외국인의 휴양지로 이름 높았던 원산에 일제가 비행장을 건설하기로 하면서 건물 이전을 추진했고, 이에 보다 아래쪽이면서 경치가 멋진 화진포가 이전 장소로 선택되었기에 이처럼 화진포에 외국인의 건물이 많았던 거라고 전해진다. 고성이 북한 영토였을 적 공산당 간부 휴양소로 사용되던 해당 건물은, 한국 전쟁 이후 이승만 정권의 실세였던 이기붕과 그의 아내 박마리아가 개인 별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이기붕 별장이라 불리게 된다. 이승만 별장은 화진포를 사이에 두고 이기붕 별장과 마주보고 있는데, 다른 별장들에 비해 작고 소박한 건물이지만 풍광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다고 한다. 한국 전쟁에서 고성을 차지한 이승만은 젊은 시절 서울 YMCA 학감 자격으로 들렀던 화진포의 풍광을 기억하고 있어 휴양지로 이곳을 선택해 별장을 지었다. 한국 전쟁의 결과로서 고성을 남한의 영토로 편입한 이승만이었지만, 그는 부통령 후보였던 이기붕과 본인의 대통령 당선을 위한 3․15 부정선거와 뒤이은 4․19 혁명의 여파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이승만이 물러난 다음날 이기붕은 대통령 사무실에서 일가족과 생을 마감하게 된다. 즉 두 별장은 1960년을 끝으로 나란히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한참 뒤인 1999년에 화진포 역사안보전시관으로 묶여 일반인에 개방된다. 그리고 이승만 별장은 2007년 별장 위쪽 육군관사로 쓰던 건물을 보수하여 자료를 추가한 뒤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으로 개관하게 되었다.
어쩐 일인지 화진포의 자연 환경은 더없이 아름답기만 한데, 호수 이름의 유래를 제공한 인물도, 그 주변에 별장을 소유했던 인물들도 과욕을 부리다가 몰락했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예나 지금이나 푸르름으로 저를 둘러싼 사람들의 흥망성쇠를 지켜보았던 화진포를 떠나, 드디어 한민족에게 가장 칭송받던 산이자 지금은 갈 수 없는 금강산을 향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