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심을 회복하는 과정에 대하여
초등학생 시절에 나는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식당에서 지냈다. 손님이 몰리는 시간이면 옥상에 홀로 올라갔는데, 텅 빈 옥상에서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그러곤 아주 맑은 날이면 핸드폰을 꺼내서 하늘을 사진에 담았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니 사진첩엔 꽤 많은 사진이 쌓였다. 사진을 넘기다 보니 문득 모두 파란 하늘인데도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 들었다. 어린 마음에 그 차이가 신기해 아버지에게 자랑하듯 보여드리며 슬쩍 물었다.
“아빠, 이거 한번 봐. 이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담은 하늘 사진이야. 네 장이 조금씩 다른데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어.” 아버지는 기특한 눈빛으로 바라봐 주셨지만 물음에 대한 답은 망설이셨다. 모두 파랗기는 한데,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아마 그런 고민을 하셨던 것 같다. “세상에는 단어가 천 개의 천 배 정도 더 필요해 보였다.” 작중 등장하는 로봇 콜리의 말이 정말로 필요한 것 같았다. 세상에는 정말 단어가 천 개의 천 배 정도는 더 필요한 게 아닌지. 하늘을 표현하는 단어가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사계절의 하늘을 모두 파란색으로 묶었다. 나눠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는 주류와 비주류가 공존한다. 둘을 가르는 기준은 아마 <다수>의 개념이 주류에게 적용된다는 점이다. 사회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한 것들에게 소홀하다. 그리고 적은 것들은 주류에 의해 소외된다. 적은 것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기에는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적이다. 멋지고 잘난 것들에 비해 작고 적은 것들을 말하는 단어는 부족하다.
기술 발전이 가속화되는 사회에선 빠르고 편리한 것들이 주류가 되었다. 무엇이든 빨라야 하는 세상에서 느린 것은 멈춘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멈춘 것은 달려가는 것들에게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세상의 기준이 다수에 의해 정립되는 것이다. 쓸모의 기준도 그들의 소유라 할 수 있겠다. <천 개의 파랑>에서는 쓸모의 기준을 재규정한다. 느리고 더딘 것은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차분하게 함께 나아가는 것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비주류들이 얼마나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는지. 그들의 다양한 사고와 감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천 개의 파랑>은 2035년 이후의 배경이지만 아직까지도 분리된 비주류의 시선에서 세상을 그린다. 인간의 이기심에 희생된 경주마 투데이, 고장 나 쓸모를 다한 기수(騎手) 휴머노이드 로봇 콜리, 소아마비로 하반신을 잃은 소녀 은혜, 현실 앞에 꿈이 좌절된 동생 연재, 과부 엄마 보경까지. 삶의 과정 속 상처를 입지만 방치되어 살아간다. 이들이 무뎌진 아픔을 인식하게 되는 건 하나의 기적에서 출발한다. 로봇 콜리가 제작 과정에서 소프트웨어 칩이 잘못 삽입돼 인간의 사고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천천히 더 천천히
작중 경주마 투데이의 병명은 퇴행성관절염. 무리한 속도에 연골이 다 닳아 관절이 무너진 것이다. 2035년 무렵, 기수 휴머노이드가 개발되고 기수의 역할이 기존 인간에서 훨씬 가벼운 로봇으로 넘어가면서 경주마들은 더 높은 속력을 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말의 근육과 관절의 진화는 기술 발전 속도보다 훨씬 더뎠고, 결과는 처참했다. 경주마의 수명은 점점 짧아지고, 소설에 등장하는 투데이는 결국 안락사를 앞둔다. “달릴 수 없는 말은 지구에서 살아갈 이유를 얻지 못했다.” 미래에도 인간들의 쓸모에 못 미치는 동물들이 설 자리는 없다. 인간들의 기준에 부합하는 것들만 살아남고 아닌 것들은 사라진다. 소설에서는 투데이를 지키기 위해 뭉친 연재, 은혜, 콜리 일당을 비롯해 여럿이 뭉친다.
“가장 느리게 뛰는 연습요.” 그들이 내놓은 투데이의 해결책은 천천히, 더 느리게 가는 것이다. “행복만이 유일하게 과거를 이길 수 있어요.” 작중 콜리는, 투데이를 살리는 방법은 투데이가 아프기 전인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선 투데이를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그 순간은 콜리와 호흡을 맞추며 마음껏 달리던 순간이다.
더 빠르게 살아야 한다고 강요받는 이가 한 명 더 있다. “두 사람의 삶을 해결해야 하는 보경은 그 전보다 더 빨라졌다.” 소방관 남편이 순직한 이후, 두 아이의 엄마인 보경은 가정의 유지를 위해 바쁘게 살아가야만 한다. 자신의 건강과 꿈은 물론 두 딸을 돌볼 여력도 없다. “내 시간은 멈춰있어.” 그런 보경의 시간은 과거 남편이 순직한 그날에 멈춰있다.
그런 보경에게 콜리가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아주 천천히 움직여야겠네요.”, “아주 느리게 하루의 행복을 쌓아가다 보면 현재의 시간이, 언젠가 멈춘 시간을 아주 천천히 흐르게 할 거예요.” 더 빨리 많은 돈을 벌고 시간을 쪼개 여유를 만들어야 할 거 같던 보경에게도 결국 해결책은 더 느리게 하루를 보내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천천히 나아가는 것은 비단 소설의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숨차게 살아가는 독자에게도 적용되는 삶의 비결 같다. 그리고 그러한 비결은 종을 넘어 동물과 로봇과 인간 모두에게 통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급하게 달리다보면 세상은 흐트러져 보인다. 그리고 당장의 모든 것을 안고 가야한다면 천천히 가는 것이 현명하다.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어서 책장을 넘기기 바빴다. 결말에 이르자, 나는 다시 책의 맨 앞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차근한 마음으로 감상하고 싶었다. 이 소설은 그런 매력이 아닐까 싶다. 다시 한번 돌아가 하나씩 살펴보게 된다. 책뿐이 아닌 하루의 어떤 부분까지 말이다. 세상이 다양한 만큼 각기 나아가는 속도는 사뭇 다를 것이다. 우리는 가장 느린 것들에게 속도를 맞출 필요가 있다. 그렇게 천천히 나아가는 과정이 공존이다.
장애인이 속한 사회
소설은 휠체어를 타는 은혜를 통해 장애인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보여준다. “다수의 입장에서는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전가하면 그만인 일이었으니까.” 결국 삶의 부담은 소외된 이들의 몫이다. 한 문장이 깊숙이 마음을 울렸다. 어쩌면 스스로 다수의 세계에 속해 있다 규정하고, 그들의 시선에 편승한 건 아닌지, 시각장애인인 조부와 함께 사는 나에겐 더욱 크게 다가왔다. ‘다르다’고 이미 생각하고 ‘신경 써야’할 대상이라 생각한 순간부터 그들을 향한 우리의 시선은 화살이 되어 날아갔다. 우리가 가져야 할 덕목은 선의의 배려가 아니다. 주류와 비주류로 나뉘어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했다.
세상은 정말 빠른 속도로 발전해가고 있다. 하지만 장애인들을 기준으로 보면 세상은 점점 더 높은 장벽을 쌓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을 높게 올려준 계단은 장애인들이 넘지 못할 벽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고, 인간을 더 멀리 가게 해준 바퀴는 휠체어를 끄는 이들에게 제약이 되어버렸다. “문명이 계단을 없앨 수 없다면 계단을 오르는 바퀴를 만들면 되잖아요. 기술은 그러기 위해 발전하는 거니까요.” 진정성을 담은 기술의 발전이란 그런 것 같다. 장애인을 비롯한 비주류들까지도 함께 나아가는 발전, 그런 가치가 기술에 녹아들었을 때 비로소 나아간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타심과 회복의 연대
은혜와 연재와 보경 세 가족은 같이 살지만, 함께 살아가지는 않는다. 방목은 소통의 부재로 이어지고 가정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다. 하지만 콜리가 집에 오고 조금씩 변화가 생긴다. 콜리를 중심으로 세 모녀 사이에 연결고리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 소설은 이타심을 회복하는 과정을 담는다. 콜리가 진정으로 가진 능력은, 다름 아님 이타심이었다. 다른 이를 생각하는 마음. 이타심은 파급력이 있다. 내 주위를 살필 여유가 없던 이들에게 어느 날 나타난 콜리는 이타심을 보여줬다. 그리고 조금씩, 천천히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세 모녀가 잃어버린 이타심의 가치를 되찾아갔다. 유대가 무색하고 연대가 무너진 사회에서 유심히 살펴야 할 가치는 결국 이타심이 아닐까 싶다. 드러나지 않을 뿐 이타심은 모두에게 내제 한다. 다만 우리에게 없는 것은 시간이다. 빠르게 달리는 세상에서 느린 것은 도태되고 결국 멈춘다. 그렇기에 우리는 걷기 시작해야 한다. 걸으며 잃어버린 시간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회복한 시간 안에서 우리는 이타심을 찾아야 한다.
“살아있지 않은 것을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인간밖에 없으리라.” 인간적인 것이 때론 세상을 파괴하는 무기가 되지만, 세상을 하나로 화합하는 계기도 결국 인간다운 마음에서 시작한다. 유별난 로봇 콜리가 나타나 모두를 변화시킨 것처럼 말이다. 인간이 가진 이타심은 세상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비춰줄 희미한 불씨가 아닐까 싶다.
“저는 실수로 만들어진 거라고 연재가 말했어요.”, “연재는 실수가 기회와 같은 말이래요.” 인간에게는 실수이지만 콜리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 상처 받은 이들에게 기회로 나타났다. 종의 경계를 넘어선 이타심으로, 누구 하나 배제하지 않고 다 함께 회복해가는 과정이 아름답다. “좌절이나 시련, 슬픔, 당신도 알고 있는 모든 단어들이 전부 다 천 개의 파랑이었다.” 작은 것, 적은 것, 아픈 것, 여린 것, 그리고 소외된 것들까지 모두 하나의 파랑으로 회복하는 연대이다. 모두 달라 보이는 것들이 결국 하늘이라는 커다란 연대의 일부분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더 높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작품이었다. 지나쳐온 작은 것들과 융합된 세계로 한걸음 나아간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