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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정 Sep 12. 2022

'어느 수집가의 초대'에 응하다

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 관람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어느 수집가의 초대 - 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에 다녀왔다. 그 인기가 어마어마해 관람 당일 오픈 전부터 1시간을 기다려서야 티켓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이번 전시는 기다림 이상의 가치를 느낄 수 있었다.


  전시는 그림부터 조각, 도자기, 유물 등 총 355점의 넓은 범위의 수집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치 수집가가 집으로 초대해서 가족과 집, 정원을 소개하고, 수집품을 하나하나 소개해주는 듯한 전시 구성이 인상 깊었고, 동일한 주제에 대하여 각기 다른 작가의 작품을 함께 배치한 구성 역시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감상을 도왔다. 너무나도 많은 작품이 기억에 남지만, 모네의 '수련'을 비롯해 특히나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작가의 작품을 위주로 기록으로 남겨보고자 한다.




클로드 모네, < 수련이 있는 연못, 1917-1920, 캔버스에 유채 >


  나를  전시로 이끈 작품. 모네의 250 점의 수련 연작  하나가 국내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웠고, 전시 1부에서 마주한 수련의 모습은 기대한 만큼이나 아름다웠다. 모네가 시력을 점차 잃어가던 말년에 그려져 수련과 연못의 형태가 분명하지 않고 주로 푸른빛을 띠고 있으나, 오히려 개체가 아닌 물의 표면과  위에 떨어지는 빛의 변화에 온전히 집중하여 탄생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게 느껴졌고, 실제로 계속해서 변하는 빛을 담아낸  위치와 각도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보여 신기했다. 빛을 그린다는 , 순간을 포착해 영원한 것으로 남기는 모네의 작업은  자체가 예술이 아니었나 싶다. 언젠가는 오랑주리 미술관에 가서 모네의 연작을 보겠다고  번이고 다짐했던 시간..!




좌, 박래현 < 피리, 1956, 종이에 수묵채색 > / 우, 박노수 < 산정도, 1960, 종이에 수묵채색 >


  2부에서 자연  인간의 모습을 담아낸 작품으로 함께 전시되어 더욱 눈길을 끌던  작품, 박래현 작가의 '피리' 박노수 작가의 '산정도'이다. 육아, 집안일과 그림 그리기를 병행하던 작가가 그렸다는 '피리', 그림에서나마 지친 심신을 뉘이고 싶었던 바람이 고스란히 담긴  여유로움이 물씬 느껴졌고, 분명 뒷모습임에도 눈을 감고 엷은 미소를   피리를 부는 사람의 표정이 보이는  같았다. 작품 전체를 가로지르는  있는 곡선으로 칠해진 나무줄기의 표현과 덩달아 여유로워 보이는 손과 발의 세밀한 표현까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함께 나무에 앉아 흥얼거리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작품이었다.


  '산정도' 보자마자 작은 탄성을 내뱉었는데, 바위산으로 달려가는 말을  여인의 모습을 담은  작품은 그림 전체에서 뿜어내는 에너지가 대단했다. 바위산을 덮은 청록색과 형광빛을  노란색은 제목처럼 쏟아지는 듯한 산의 정기를 표현하기에 가장 완벽한 색인  같았고, 먹색과 어우러지니 생명력과 신비로움까지 느껴져 마치 영화 '아바타'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다. 어떻게 이렇게 그림 밖까지 힘이 느껴지는 작품을 만들어   있을까 볼수록 신기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박대성, < 불국설경, 1996, 종이에 수묵채색 >


  이번 전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 하나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작품이라고 말할  같다. 어두운 공간에 전시된 불국설경을 마주했을 , 마치  내린 불국사에 잠시 다녀온 느낌이었다. 가장 추운 계절에 사람   보이지 않는 풍경이지만 나에겐 '적막함'보다는 '포근함'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올랐는데, 포근하면서도 웅장한 느낌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오랜 시간을 머물렀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이 덮인 부분은 아무것도 칠해지지 않고 음영 부분에만 먹색이 입혀진 것을   있는데, 수묵화가 주는 특유의 절제되고 깊은 분위기에 작가가 1 동안 불국사에 내려가 그림을 그릴  선물처럼 7 만에 눈이 내려 탄생한 작품이라는 서사까지 더해지니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던 작품. 작가가 선택한 장소와 시기, 재료까지 모든 것이 '신의  ' 였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좌, 김환기 < 산울림 19-II-73#307, 캔버스에 유채 > / 우, 유영국 < 무제, 1993, 캔버스에 유채 >

  

  다리가 조금씩 아파올 때 즈음, 눈을 다시 커지게 만들었던 두 그림. 김환기 작가와 유영국 작가의 작품이다. 같이 걸려있던 것은 아니지만 깊고 푸른 색감과 압도되는 분위기,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한참을 들여다보게 되는 점에서 비슷한 기분을 느꼈는데, 전시장을 나와 두 작가에 대해 찾아보며 한국 추상미술의 초석을 이룬 거장이자 일본에서 함께 유학을 하던 각별한 사이임을 알게 되어 흥미로웠다. 같은 시기에 활동했지만 한국 추상미술을 전혀 다른 양식으로 발전시키며 작품세계를 펼친 점도 신기했던!

 

  김환기의 작품을 처음 마주했을 , 우선 거대한 크기에 놀랐고, 점과  점을 둘러싼 사각형 수백 개로 캔버스 전체를 채우는 기법에    놀랐다. '전면점화'라고 불리는  기법은 조금  가까이 들여다보면 수많은 사각형과  안에 점들이 자연스럽게 번지며 여러 개의 동심원을 이루고 있음을   있는데, 유화임에도 수채화처럼 번지며 색이 자연스럽게 겹쳐지도록  점이 인상 깊었다. 자연스레 겹치며 번지는 표현이 마치 잔잔한 물에 돌멩이를 던진 , 공중에 소리가 울려 퍼지듯 조금씩 움직이는  같은 착각을 만들어 내는  같았고, 멀리서  때와 가까이서   전혀 다른 느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유영국의 작품은 정사각형 캔버스에 도형 위주의 단순한 구성이 대칭을 이루어 안정적이고 차분한 느낌을 주었고, 새벽녘의 바다와 , 하늘에  있는 달과 물에 비치는 달을 담은  고요하고 정적인 느낌에 나도 모르게 작품에 집중하게 되었다. 유영국은 몬드리안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연추상'이라는 독자적 세계를 구축하며 선과 , 색채로 이루어진 그만의 자연의 형태를 담아내었다고 하는데  색감과 느낌이 편안하고 좋아 그가 바라본 자연은 어떤 모습이기에 이런 느낌을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고,  다른 색감과 형태로 담아낸 작품이 만나고 싶어졌다. (그림의 일부분인  하단의 붉은 서명까지 센스 넘치던 잊을  없는 작품!)



  

  여러 작가의 작품을 모은 컬렉션 전시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의 작품들로 구성되어  작가의 일생을 따라가며 작품을 보고, 작가가 작품에 부여한 의미를 찾는 전시를 선호하던 나에게 이렇게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한곳에서 만난 전시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특히나 누군가의 수집품들로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시대를 아우르는 작품들을  번에 만나는 전시는 처음이었는데, 여러 작가의 서로 다른 개성이 담긴 작품을 관람하는 것에 더하여 작품들에 대한 수집과의 시선과 의미까지도 함께 느낄  있는 시간이었기에 단일 작가의 전시와는  다른 재미가 있었다.


  모네의 '수련'   있다는 이야기에 처음 관심을 가졌지만, 막상 가보니 수련만큼이나  마음을 사로잡은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만나 어딘지 모르게 뿌듯했던 시간. 그동안 외국 유명 작가의 전시를 주로 다녔다면, 이번 수집가의 초대에 응하며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많은 한국 작가들을 알게 되어 그분들의  많은 작품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수집가의 문화에 대한 애정과  영향력을 충분히 느낀 전시, 글을 쓰는 지금까지  여운이 남아있는 듯하다. 서울 전시는 종료되었지만, 10월부터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전시를 이어간다고 하니 가능한 분들은 방문해 보시길 적극 추천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물건을 만들어냅니다.

물건을 모은다는 것은,
물건에 담긴 이야기를 모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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