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어두운 자리에서 일어날 시간
뭔가에 몰두하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보통은 직면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 찾아올 때다. 그를 피하고자 일에 전력투구한다. 그런데 그렇게 애쓰는 과정은 대부분 그리 알차지 않았다. 보통 기계적이고 소모적이었다. 물론 일이란 게 늘 그럴 법도 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가 분명히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입맛이 썼다. 경치 좋은 곳을 여행하듯 일을 즐길 때와는 달리, 마치 노예인 것처럼 일에 혹사당해 온몸에 흔적을 가진 탓이다. 최근에 일과 함께 돌진했던 모습을 돌아보니 무기력감의 그림자가 뻗어 있었다.
코로나 19가 창궐한 이후,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참 많아졌다. 물리적인 사유니, 누구나 양해할 수 있는 말거리가 됐다. 이게 한동안 편리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의 속을 가늠하게 하는 다림줄 같은 것이 됐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소통하거나 만날 수 있다면 중요하거나 소중한 관계라는 것. 반면에 그렇지 않다면 덜 중요하거나 소중하지 않다는 것을 방증하는 계기가 됐다고 믿게 됐다. 어떤 사이든 이전보다 두텁지 못하며 서먹한 느낌이 들고 그 감정이 켜켜이 쌓여가니 관계를 개선할 자신감은 물론 기운마저 없어졌다.
이런 패턴에 적잖게 잠식됐다고 인지했을 때 문득 마음의 그늘이 보였다. '더 좋아질 방법은 없다'라거나, '해볼 수 있는 것은 웬만큼 해봤는데 별로 효과 없다'라고 결론 내리고, 혹은 '이 문제의 원인은 다른 사람에게 있다'며 탓하는 내가 거기에 앉아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곳이 내가 있고 싶은 자리가 아니란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당연히 마음 어딘가에는 어두운 자리가 있다. 그런데 그곳에 앉을지 말지는 늘 내 선택이었다. 밝은 곳을 놔두고 굳이 컴컴한 곳으로 가는 것은 평소 원하거나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평상시의 나는 내가 바라고 택한 모습이다. 외부 상황과 환경, 여건, 관계, 문제 등에 한결같이 영향을 받던 입장에서 벗어나 되레 영향을 주기로 애쓰는 사람이다. 부정적인 이유 9가지가 있더라도 긍정적인 사유 1가지만 있다면 굳이 후자에 주목하고 싶어 한다. '어제까지 안 된 일은 오늘도 안 될 것'이라고 단념하기보다 '어쩌면 오늘 될 수도 있다'라고 믿는 바보다. 이것이 내가 선택한 태도다. 이것을 유지하려면 내가 본래 어떤 사람인지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고 보니 내 시선이 꽤 오랫동안 바깥세상에만 머물러 있었다.
내면을 잘 돌아볼수록 사라졌다고 믿었던 기운이 가슴 한편에 몽글댄다. 대단한 것을 발견하지 않았다. 그저 어느 자리에 있었는지를 알게 됐다. 태도가 이전과 달랐던 것을 안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알았으니 다시 제대로 출발하면 그만이었다. 혹시 어느 자리에 주저앉은 나를 만났더라도, 그냥 두고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도움이 필요할 뿐, 버려져야 할 사람은 아닐 테니. 언제든 이런 의지를 가진 나라면, 지금 잠시 무기력했더라도 또다시 기운을 차릴 수 있다. 이게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이기 때문이다.
저를 향해 한결같은 대상을 만나게 되면
좀 더 잘 살고 싶어 집니다.
실제 저보다 더 나아질 모습을 기대하면서
그런 방향으로 크든 작든 노력할 힘을 얻어서입니다.
저 또한 그렇게, 누군가에게 한결같아
작은 오솔길이라도 내어주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