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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Feb 06. 2024

재난 이후의 세계를 어떻게 견딜 것인가

아오야마 신지-<유레카>


1995년 3월 20일 오전. 도쿄의 지하철역들에서 한 무리의 남자들이 무차별적으로 독가스를 살포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옴진리교의 신자들이 벌인 도쿄 지하철 사린 테러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공식적으로 14명이 사망했고 600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다. 나는 여기서 이 사건을 자세히 서술할 생각은 없다. 그건 내 능력 밖의 일이다. 다만 나는 이러한 비극 이후 탄생한 한 편의 걸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비극을 마주하는 것은 비극의 존재론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이다. 왜 비극이 발생했는가? 어떤 영화들은 여기서 시작하여 비극의 인과성에 대해서 탐구하고자 한다. 혹은 어떤 영화는 비극이 지니는 불가해성 자체로 뛰어들기도 한다(가장 대표적으로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 그러나 아오야마 신지의 <유레카>는 비극 자체에 대해서 질문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는 비극 자체가 아닌 비극 이후의 세계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서 질문하기 위해 <유레카>를 만들었다.


먼저 <유레카>의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해야 할 것 같다. 어느 날 한 남자가 버스를 납치하여 무차별적으로 승객들을 죽이는 테러를 행한다. 경찰이 이 버스를 포위하자 남자는 자살한다. 그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던 버스 기사 사와이는 어느 날 그때 당시 버스에 있었던 남매를 재회하고 그들의 집에서 함께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사와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연쇄 살인이 일어나고 버스 기사가 용의자로 몰린다. 그러자 사와이는 버스 한 대를 개조한 뒤 자신과 함께 살고 있는 남매와 남매의 사촌 형을 데리고 무작정 여행을 떠난다. 그러던 중 자신이 데리고 다니던 남매의 오빠인 나오키가 살인 사건의 범인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사와이는 그 소년을 경찰서에 데려가 자백하게 만든 뒤 다시 여행을 떠난다.


어떤 이는 영화의 초반부만 보고서 이후 경찰과 사와이 사이의 추적극이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라고 기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기대는 완전히 어긋난다. 사와이가 그 지역을 벗어나자 경찰은 영화에서 감쪽같이 사라진다. 아오야마 신지는 <유레카>를 경찰과 범인 사이의 추적극으로 찍지 않았다. 이 플롯에서의 핵심은 무엇인가? 사와이는 자신에게 씌워질 누명을 피해서 아이들과 함께 세상 바깥으로 나갔다. 그런데 자신이 데리고 나온 아이가 범죄의 주인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자신의 손으로 데리고 나온 이 아이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어떻게 짊어질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마주해야만 한다. 다시 한번 반복. <유레카>는 비극의 인과에 대해서 질문하는 영화가 아니다. 아오야마 신지는 이 영화를 통해서 비극 이후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영화 속에서 왜 나오키가 연쇄 살인을 저질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사와이는 그 아이에게 이유를 묻는 대신 나오키 자신이 직접 죄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짊어지도록 한다. 그러면서 아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윤리적 선택. 우리는 앞서 버스 테러범이 자신의 윤리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자살한 것을 보았다. 사와이는 그런 선택을 반복하지 않는다. 그는 아이를 경찰서에 보내면서 모든 윤리적 책임을 나오키에게 전가할 수 있었으나 그 이후에도 아이를 기다리겠다고 선언한다. 비극 이후의 세계.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타인에 대한 불신이 더욱 커진 세계. 그럼에도 사와이는 아이의 존재를 긍정하고 동시에 아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남매의 사촌 형처럼 비극과 자신을 도덕적으로 분리하고자 한다. 그런 사촌 형을 사와이는 버스에서 내쫓는다. 그런 이들은 더 이상 사와이의 버스에 탈 자격이 없다. 이 버스 안에는 나오키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나오키의 유령을 아는 자들만이 남을 수 있다. 아오야마 신지는 분명하게 말한다. 어떠한 큰 재난과 비극이 있더라도, 어떤 거대한 상실이 있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그 세계를 함께 살아가는 서로를 믿어야만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산 정상에 도착한 뒤 사와이와 나오키의 여동생이 내린다. 곧이어 나오키의 여동생이 종이에 적힌 이름들을 찢은 뒤 그 이름들을 하나씩 던지며 자신의 입으로 부른다. 영화에서 여동생이 처음으로 말하는 순간. 이 장면은 마치 비극 이후 자신의 세계 안에 갇혀 있던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내딛는 첫걸음처럼 보인다. 세상과 관계 맺는 것은 곧 내 옆의 타인과의 관계를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나오키의 여동생은 그제서야 자신이 맺어온 그 모든 관계를 긍정한다. 사와이는 처음으로 말문을 연 이 소녀에게 말한다. “이제 집에 가자.” 그 순간 흑백으로 진행되던 영화가 컬러로 바뀌고 카메라는 하늘에서 부감으로 두 인물을 담아낸다. 그리고 화면에 뜨는 제목. <유레카>. 아오야마 신지는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 아니 어쩌면 이 마지막 장면을 보고 깨달은 것은 관객인 우리 자신일 것이다. 세계를 긍정하기. 재난과 불신이 가득하더라도 이 세계와 타인을 진정으로 믿고 긍정하기. 이러한 영화적 윤리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에서도 이어진다. 아사코가 료헤이에게 돌아올 때, 더 이상 아사코를 온전히 신뢰할 수 없을 때, 그럼에도 료헤이는 아사코를 받아들인다. 재난 이후의 상실, 상실에서 기인한 불신, 그럼에도 서로를 믿는 것. 하마구치 류스케가 그렇게 대지진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듯이 아오야마 신지도 <구름 위에 살다>를 통해 대지진 이후의 일본을 이야기한다. 그건 어쩌면 스와 노부히로의 <바람의 목소리>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이 영화들이 호소하듯이 당신에게도 호소하고자 한다. 당신이 지금 살고 있는 세계를, 그 세계를 함께 살아가는 우리를 믿어주고 긍정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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